검은 셔츠 입으면 이긴다…1억 베트남을 홀린 한국인 감독

김상식, 전북 떠난 지 3년 만에 ‘킹상식’
베트남 첫 2연패…‘친형 리더십’ 통했다

“김상식! 김상식!”

 

베트남 축구대표팀 라커룸. 선수들의 연호가 울려 퍼졌다. 다들 손뼉으로 박자를 맞추며 한 사람을 바라봤다.

 

우승 뒤 라커룸에서 댄스 세리머니를 펼치는 김상식 감독. AI로 재현한 이미지.

김상식 감독이 라커룸 한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무릎을 어정쩡하게 굽히고 두 팔은 허리 아래로 축 늘어뜨린 채 엉덩이를 흔들기 시작했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막춤 트위스트’였다.

 

박자는 자꾸 반 박자씩 밀렸지만 표정만큼은 누구보다 신이 나 있었다.

 

선수들은 자지러졌다. 휴대전화를 치켜들고 고함을 지르며 함께 몸을 흔들었다.

 

“우승하면 춤을 추겠다.”

 

결승을 앞두고 선수들과 한 약속이었다. 감독은 온몸을 던져 그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

 

아세안컵 2연패를 달성한 뒤 헹가래 받는 김상식 감독. 베트남축구연맹 페이스북 캡처

 

2026년 8월, 베트남이 아세안컵 결승에서 숙적 태국을 넘어 2연패를 달성했다. 2년마다 열려 ‘동남아 월드컵’으로 불리는 이 대회에서 베트남이 처음 쓴 역사였다. 박항서 감독 시절에도 없던 일이었다.

 

경기장 밖은 뜨거웠다. 오토바이가 도로를 메웠다. 경적은 자정을 넘어 새벽까지 이어졌다. 베트남 국기 금성홍기 사이로 태극기가 펄럭였다. 인구 1억 나라가 한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김.상.식. 똣(최고)!”

 

3년 전, 전주에서 그가 들은 외침은 전혀 달랐다.

 

버스 앞에 선 감독

 

2023시즌 전북 현대는 개막부터 흔들렸다. 우승이 익숙했던 팀이 순위표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4월 1일 홈 포항전 관중석에는 감독과 대표이사를 비판하는 현수막이 걸렸다. 서포터즈는 응원을 멈췄다. 1-2 역전패 뒤에도 경기장을 떠나지 않았다.

 

팬들은 구단 버스 앞을 막아섰다. 대치는 2시간 동안 이어졌다. 

 

“감독은 물러나라.”

 

그에게 전북은 남의 팀이 아니었다.

 

2009년 녹색 유니폼을 처음 입은 뒤 선수, 코치, 감독으로 15년을 보낸 팀이었다. 처음 온 해 선수로 우승했고 2021년 감독에 오른 첫해에도 리그 정상에 섰다.

 

결국 그해 5월, 그는 스스로 물러났다. 마지막 인사는 손편지였다.

 

‘전북답지 않은 결과’에 책임을 지겠다고 했다. 이제는 전북을 사랑하는 한 명의 팬으로 멀리서 응원하겠다고 썼다.

 

그렇게 녹색 유니폼을 벗었다.

 

또 태국, 또 김상식이었다

 

1년 뒤, 그가 선 곳은 하노이였다. 베트남 대표팀 지휘봉을 잡아 성인 대표팀과 23세 이하 대표팀을 함께 맡았다.

 

베트남 축구는 한동안 이어진 상승세가 꺾인 상태였다. 새 감독에게 주어진 과제는 분명했다. 다시 동남아 정상에 오르는 것.

 

넘어야 할 상대도 정해져 있었다. 태국이었다.

 

베트남과 태국은 동남아 축구의 앙숙이다. 두 나라가 맞붙는 날이면 거리에서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하지만 승부의 추는 오랫동안 태국 쪽으로 기울었다. 태국은 아세안컵 최다 우승국이다.

 

김 감독은 첫 대회부터 답을 내놨다.

 

아세안컵 결승에서 ‘동남아 최강’ 태국을 꺾고 정상에 올랐다.

 

이듬해에는 U-22 대표팀을 이끌고 나선 동남아시안게임 결승에서도 태국을 연장 끝에 3-2로 눌렀다.

 

그리고 다시 아세안컵 결승.

 

상대는 또 태국이었다.

 

결과도 같았다. 베트남이 웃었다.

 

김상식 감독 댄스 세리머니. 베트남축구연맹 페이스북 캡처

 

이름부터 외운 한국인 감독

 

승리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선수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성조까지 정확히 부르려고 따로 연습했다.

 

베트남 국가는 유튜브를 보며 혼자 배웠다. 베트남어 가사를 한글로 받아 적고, 그 위에 음표와 음높이를 그려 넣었다. 발음은 선수들이 하나하나 고쳐줬다. 경기 전 국가가 울리면 그는 가슴에 손을 얹고 함께 부른다.

 

춤도 선수들과 거리를 좁히는 방식이었다.

 

“언제까지 감독이 무게만 잡고 있어야 할 필요는 없는 거 아닙니까. 축구 훈련이라든지 정신적으로 너무 강하게 시키고 있고, 또 생활 면에서 그냥 친형처럼 대하고 있기 때문에 시너지 효과가 많이 나타난 것 같아요.”

 

훈련장에서는 엄하게, 밖에서는 ‘친형’처럼.

 

‘검은 셔츠’를 입고 베트남의 아세안컵 2연패를 이끈 김상식 감독. 베트남축구연맹 페이스북 캡처

 

검은 셔츠의 주술

 

베트남 팬들은 이제 김상식 감독의 옷장까지 들여다본다.

 

그가 즐겨 입는 검은 폴로셔츠는 현지에서 ‘풍수 셔츠’로 불린다. 행운을 부르는 셔츠라는 뜻이다. 첫 아세안컵 트로피를 들어 올린 날도, U-23 대표팀을 이끌고 동남아 정상에 선 날도 그는 검은 셔츠 차림이었다.

 

이번 아세안컵 조별리그에서 딱 한 번, 김 감독이 흰 셔츠를 입고 벤치에 나타났다. 싱가포르전이었다.

 

베트남은 이기지 못했다.

 

팬들 사이에서 “흰 셔츠 때문”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번졌다.

 

다음 인도네시아 원정, 그는 다시 검은 셔츠를 입었다.

 

베트남은 3-0으로 완승했다.

 

수비수 팜쑤언마인을 비롯한 선수들은 김 감독의 검은 셔츠에 입을 맞췄다.

 

김상식 감독. 베트남축구연맹 페이스북 캡처

 

‘킹상식’의 탄생

 

베트남이 아세안컵을 들어 올린 건 통틀어 네 번. 그 가운데 두 번이 김 감독의 부임 이후 나왔다.

 

현지에선 그를 ‘킹상식’이라고 부른다. 2연패를 확정한 직후 김 감독도 “오늘은 내가 베트남 축구의 왕”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그런데 이번엔 춤이 없었다. 

 

“춤추기 싫었던 게 아닙니다. 이번 대회에서는 모든 관심과 영광이 제가 아니라 선수들에게 돌아가길 바랐습니다.”

 

전주에서 팬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던 감독.

 

3년 뒤 하노이에서는 선수들의 손에 들려 하늘로 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