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명문 스탠퍼드대 출신 교사가 만든 스파클링 와인 대박난 이유 [최현태 기자의 와인홀릭]

<기후변화 맞서는 캘리포니아 와인 산지를 가다 ⑱라이켄 에스테이트>

라이켄 에스테이트 오너 더그 스튜어트,

스탠퍼드대서 교육학·역사학 전공

교사하다 앤더슨 밸리 자연 풍광 반해

피노그리·피노누아로 스파클링 와인 생산

고밀도 식재·유기농 재배·최소 개입 양조

평론가들 “미국 스파클링 와인 신성” 극찬

 

라이켄 에스테이트 오너·와인메이커 더그 스튜어트. 최현태 기자

라이켄(Lichen). 지의류라는 뜻으로 나무껍질이나 바위 표면에 붙어 자라는 생물입니다. 이끼와 비슷해 보이지만 이끼는 식물이고, 지의류는 균류(곰팡이)와 조류(녹조류)가 한 몸처럼 협력해 사는 공생 생물입니다. 균류가 몸체와 수분을 지키고 조류가 광합성으로 양분을 만들어 나눠 갖습니다. 캘리포니아 멘도시노 카운티의 앤더슨 밸리(Anderson Valley)에 있는 한 와이너리 오너는 이에 감명받아 ‘자연과 농부도 지의류처럼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는 철학을 와이너리 이름에 깊이 새깁니다. 앤더슨 밸리 스파클링 와인의 품격을 한 단계 끌어올리며 큰 주목을 받고 있는 라이켄 에스테이트(Lichen Estate)입니다.

 

라이켄 에스테이트 와인.  홈페이지

◆양 목장이 스파클링 와인 성지로

 

앤더슨 밸리 필로(Philo) 마을 로더러 에스테이트(Roederer Estate)로 들어서자 라이켄을 이끄는 더그 스튜어트(Doug Stewart) 오너 겸 와인메이커가 반가운 얼굴로 맞이합니다. 이곳에서는 캘리포니아와인협회(California Wines) 주최로 인근 생산자들이 참여해 ‘회복력 있는 미래(Resilient Future)’를 주제로 앤더슨 밸리 스파클링 와인의 매력을 알리는 행사가 열렸습니다.

 

캘리포니아 노스코스트 와인 산지. winebow.com

더그는 사실 교육자 출신입니다. 소노마에서 자라 미국 명문 스탠퍼드대학교에서 역사학 학사를 딴 뒤 같은 대학원에서 교육학 석사를 취득합니다. 대학 재학 시절 우수한 성적을 거둬 미국 최고 권위 학술 명예 회원 단체인 ‘파이 베타 카파(Phi Beta Kappa)’에 선정됩니다. 졸업 후 1991~1994년 중학교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칩니다. 그러다 유기농 열대우림 소르베·젤라토 회사 하울러(Howler)를 창업해 전국의 고급 유기농 식료품점에 납품하는 사업가로 변신합니다.

 

멘도시노 카운티  앤더슨 밸리 위치. 앤더슨밸리와인협회

하울러를 한창 운영하던 2000년, 더그는 아내 아나 루시아 스튜어트(Ana Lucia Stewart)와 앤더슨 밸리의 아름다운 풍경에 반해 땅을 사들입니다. 무려 203에이커(약 82ha)에 이르는 넓은 땅은 150년 동안 양을 키우던 목장이었습니다. 부부는 이 땅에서 뭘 할까 고민하다가 와인을 빚기로 결정, 2005년 첫 와인 브랜드 브레고 셀라스(Breggo Cellars)를 설립합니다. 브레고는 앤더슨 밸리의 중심 마을인 분빌(Boonville)에서 과거에 쓰이던 독특한 고유 방언 분틀링(Boontling)어로 양을 뜻합니다. 원래부터 양 목장이었으니 아주 자연스러운 이름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동네 사람들은 이 땅을 ‘브레고’로 기억합니다. 목표는 앤더슨 밸리 와인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자가 포도밭이 아직 없던 브레고는 앤더슨 밸리에서 가장 이름난 포도밭의 포도를 사서 와인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브레고 셀라스 전경. 인스타그램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첫 빈티지를 내놓자마자 찬사가 쏟아졌습니다. 세계적인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는 브레고의 피노 그리 2006 빈티지를 두고 “신대륙에서 만든 피노 그리 중 최고”라고 극찬합니다. 또 미국 푸드 앤 와인(Food & Wine) 매거진은 브레고를 ‘2008년 최고의 신생 와이너리’로 뽑습니다. 브레고는 순식간에 멘도시노 카운티 역사상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와이너리가 급부상합니다.

 

브레고 셀라스 와인. 인스타그램

그사이 부부는 자기 땅에서도 조용히 꿈을 키웠습니다. 2007년부터 토양을 다졌고, 2008년 직접 포도나무를 심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2009년 경기 침체가 찾아왔고, 부부에게 거절하기 힘든 매각 제안이 들어옵니다. 고민 끝에 부부는 브레고 브랜드를 나파 밸리의 클리프 레데 빈야드(Cliff Lede Vineyards)에 매각하고 와이너리와 테이스팅룸도 5년간 빌려줍니다. 하지만 땅만은 끝까지 지켰습니다. 언젠가 내 포도밭에서 난 포도로 스틸 와인과 스파클링 와인을 만들겠다는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라이켄 에스테이트 전경. 홈페이지
라이켄 에스테이트 전경. 인스타그램

결국 더그는 2011년 차고에서 작은 와이너리 라이켄 에스테이트를 시작합니다. 이웃한 로더러 에스테이트(Roederer Estate)의 와인메이커 미셸 살그(Michel Salgues)에게 양조 기법을 배워 2012년부터 직접 스파클링 와인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임대가 끝난 2014년 더그는 자신의 ‘첫 에스테이트 와인’을 내놨습니다. 바로 2008년 처음 심은 자신의 포도로 만든 스파클링 와인입니다.

 

라이켄 에스테이트 와인 스타일을 설명하는 더그 스튜어트. 최현태 기자
라이켄 에스테이트 화이트 피노 누아 레이블 지의류 그림. 인스타그램

라이켄(Lichen). 이 이름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겨울이 되면 농장의 참나무는 잎을 모두 떨굽니다. 그런데 나뭇가지에 걸린 초록빛 지의류만은 유령처럼 그대로 남아있어요. 이 지의류는 곰팡이와 조류가 한 몸을 이뤄 사는 생물로 앤더슨 밸리 어디에서나 볼 수 있습니다. 지의류는 이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균류(곰팡이)와 조류(녹조류)가 서로 긴밀히 협력해 살아가는 공생 생물입니다. 저는 여기서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지의류처럼 자연과 농부가 서로 돕고 상생하는 관계가 돼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기려 와이너리 이름을 라이켄 에스테이트(Lichen Estate)로 지었답니다.”

 

임대 기간이 끝나면서 2015년 더그는 빌려줬던 옛 와이너리 건물로 돌아옵니다.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은 극적입니다. 2023년 여름, 부부는 14년 전 떠나보낸 브레고 브랜드 상표권까지 다시 사들여 지금은 라이켄과 브레고 와인을 함께 선보입니다.

 

포도나무를 살피는 더그 스튜어트. 인스타그램

◆땅과 함께 사는 농부

 

더그 부부의 목표는 처음 이 땅에 왔던 2000년보다 더 건강한 땅을 후손에게 물려주는 일입니다. 그래서 유기농으로 포도를 재배합니다. 또 밭 고랑의 흙을 뒤엎지 않는 무경운(No-Till) 농법을 고수합니다. “땅을 갈아엎지 않으면 흙 속 유익한 미생물 생태계와 곰팡이 네트워크가 파괴되지 않아, 포도나무가 영양분을 더 효율적으로 빨아들입니다. 흙이 맨살을 드러내지 않도록 포도나무 사이사이엔 다양한 식물과 토종 풀, 즉 피복작물(Cover Crops)을 상시 심어둡니다. 이 식물들은 겨울철 집중 호우에 흙이 쓸려 내려가는 것을 막아주고, 공기 중 질소를 땅에 붙잡아 화학 비료 없이도 천연 유기물을 흙에 공급한답니다.”

 

라이켄 에스테이트 양떼. 인스타그램

풀 관리는 양이 맡습니다. 에스테이트에는 약 80마리의 양이 포도밭을 돌아다니며 풀과 포도나무 아랫잎을 뜯어 먹습니다. 말하자면 ‘자연 예초기’입니다. 덕분에 잡초를 없애려고 화학 제초제를 쓸 일이 없고, 트랙터가 포도밭을 오가는 횟수도 최소로 줄어 화석 연료 사용과 탄소 배출, 대기오염이 크게 줄었습니다. 양이 남기는 배설물은 그대로 땅을 기름지게 하는 천연 비료가 되니, 양 목장이던 땅이 양 덕분에 되살아나는 선순환이 만들어진 셈입니다.

 

부지 절반을 야생 구역으로 남겨 놓은 라이켄 에스테이트.  인스타그램

야생을 위한 자리도 넉넉히 남겼습니다. “203에이커 부지 가운데 포도밭과 양 사육 시설을 뺀 절반 넘는 땅을 야생 구역으로 그대로 뒀습니다. 특히 야생동물들이 능선과 계곡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도록 울타리 없는 야생 통로도 개방해 놓았어요. 그래서 가을철 수확이 끝나고 즙을 짜고 남은 포도 껍질과 씨앗을 밭에 뿌릴 천연 퇴비로 만들기 위해 쌓아두면, 숲에 살던 야생 곰들이 냄새를 맡고 내려와 이를 먹기 위해 헤집고 다닙니다. 청개구리와 꿀벌, 귀뚜라미는 포도밭에서 함께 살아갑니다. 라이켄 이름처럼 ‘자연스러운 공생’을 실천하고 있답니다.”

 

앤더슨 밸리와 와이너리와 라이켄 에스테이트 위치. 앤더슨밸리와인협회

◆고밀도 식재와 손대지 않는 양조

 

라이켄 포도밭은 분빌과 필로 사이 언덕 비탈에 자리합니다. 멘도시노 해안이 가까워 아침마다 서늘한 바다 안개가 계곡을 감싸고, 그 덕에 포도가 익는 기간이 길며 낮밤 기온차도 큽니다. 비탈에서 흘러내린 점토질 사양토는 물이 잘 빠지는데, 이런 땅에서 자란 피노 누아는 페놀 성분이 복합적이고 탄닌 구조도 탄탄해집니다.

 

눈길을 끄는 건 포도나무 간격입니다. 포도나무를 가로세로 1m씩 극도로 촘촘하게 심었습니다. 프랑스 상파뉴와 부르고뉴 그랑 크뤼 마을 포도밭과 같은 방식입니다. 이렇게 고밀도로 식재하면 포도나무는 살아남기 위해 뿌리를 더 깊이 내려 다양한 미네랄을 끌어 올리며, 알이 작고 풍미가 응축된 포도를 얻을 수 있습니다. 현재 라이케이 소유한 7에이커 규모 포도밭은 100% 유기농법과 지속 가능한 농법으로 관리하며 피노누아가 약 75%, 피노 그리가 약 25%를 차지합니다.

 

라이켄 포도밭 고밀도 식재. 인스타그램
셀러에 와인 테이스팅하는 더그 스튜어트. 인스타그램

밭에서 건강하게 키운 포도는 양조장에서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라이켄의 양조 철학은 한마디로 ‘덜어내기’입니다. 인공 첨가물과 과도한 화학적 개입을 차단하고, 가장 부드러운 압착 장비로 포도 본연의 개성이 다치지 않게 즙을 짜냅니다. 이렇게 하면 앤더슨 밸리의 청정한 환경과 토양의 순수한 맛이 병 속에 고스란히 담긴다고 더그는 설명합니다.

 

라이켄 에스테이트 스파클링 와인. 인스타그램

스파클링 와인은 모두 프랑스 샴페인처럼 병에서 2차 발효와 숙성을 거치는 전통 방식으로 만듭니다. 그런데 품종이 좀 독특합니다. 보통 화이트 품종으로 만드는 샴페인 블랑 드 블랑(Blanc de Blancs)은 샤르도네로 만듭니다. 더그는 샤르도네 대신 피노 그리로 만듭니다. 그래서 블랑 드 그리(Blanc de Gris)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블랑 드 누아(Blanc de Noir)는 샴페인처럼 피노 누아로 만듭니다. 또 여러 빈티지의 피노누아를 블렌딩해 복합미를 극대화한 솔레라(Solera) 피노누아도 만듭니다. 앤더슨 밸리, 부르고뉴, 샴페인 스타일의 경계에 서 있는 독창적이고 섬세한 와인입니다.

 

라이켄 에스테이트 피노 누아. 인스타그램

이렇게 빚은 와인은 평가로 입증됩니다. 북미 최대 규모이자 가장 권위 있는 대회로 꼽히는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와인 컴피티션(San Francisco Chronicle Wine Competition)에서 라이켄 스파클링은 최고상인 더블 골드를 여러 차례 받으며 미국 스파클링 와인의 신성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해외 매체 평가도 호의적입니다. 디캔터(Decanter)는 라이켄 문글로 피노누아(Moonglow Pinot Noir) 등에 90점 이상을 주며 앤더슨 밸리의 우아함과 집중도를 잘 표현했다고 평가했습니다. 잰시스 로빈슨 닷컴(JancisRobinson.com)은 가뭄 등 기후 위기 속에서도 높은 품질의 산미와 순수한 과실 풍미를 지켜내는 생산자로 소개했습니다. 피노누아 전문 매체 프린스 오브 피노(The Prince of Pinot)는 스파클링과 일반 피노누아 제품군 모두 독창성과 뛰어난 균형을 갖췄다며 강력히 추천했습니다.

 

라이켄 에스테이트 그랑 퀴베 로제. 최현태 기자

◆라이켄 에스테이트 대표 스파클링 와인

 

▶라이켄 에스테이트 그랑 퀴베 로제(Lichen Estate Grand Cuvée Rosé)

 

피노누아 100%입니다. 신선한 산딸기와 잘 익은 크랜베리, 석류의 붉은 과실 향이 먼저 올라옵니다. 시간이 지나면 말린 장미 꽃잎의 화사한 향이 더해지고, 오랜 병 숙성이 주는 버터 바른 브리오슈와 구운 아몬드의 고소한 이스트 풍미가 겹겹이 쌓입니다. 입안에서는 조밀하고 크리미한 버블이 부드럽게 감깁니다. 블러드 오렌지와 핑크 자몽 껍질을 닮은 상쾌한 산미가 깊이를 더하고, 기분 좋은 쌉싸름한 미네랄이 깔끔하고 긴 여운을 남깁니다.

 

붉은 과실의 섬세한 뉘앙스와 산미를 살려 주는 요리와 잘 어울립니다. 훈제 연어 카나페나 연어알을 올린 데블드 에그, 얇게 썬 프로슈토를 얹은 브루스케타와 좋은 짝을 이룹니다. 구운 닭고기나 칠면조 같은 가벼운 가금류, 랍스터 테일 구이와도 무난하게 맞습니다.

 

라이켄 에스테이트 블랑 드 그리. 최현태 기자

▶라이켄 에스테이트 블랑 드 그리(Lichen Estate Blanc de Gris)

 

피노그리 100%로 스파클링 화이트 와인의 틀을 깨는 매력적인 향이 특징입니다. 은방울꽃 같은 흰 꽃 향에 잘 익은 멜론과 배, 살구 향이 이어지고, 은은한 바닐라와 크림, 버터의 부드러운 뉘앙스가 뒤를 받칩니다. 일반적인 스파클링 와인보다 산미가 부드럽고 둥글어 질감이 매끄럽습니다. 과실 본연의 은은한 단맛이 감돌고 풍미가 풍부해서, 톡 쏘는 산미를 즐기지 않는 이들에게도 매력적입니다.


크리미하고 부드러운 질감 덕분에 식전주로 즐기기에도 좋습니다. 소스를 쓰지 않고 본연의 단맛을 살린 찐 대게나 킹크랩 살, 부드러운 관자구이와 어울립니다. 허브를 곁들인 염소 치즈 타르트나 크림치즈를 얹은 크래커와도 좋은 궁합을 보입니다.

 

최현태 기자는 국제공인와인전문가 과정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레벨3 Advanced, 프랑스와인전문가 과정 FWS(French Wine Scholar), 부르고뉴와인 마스터 프로그램, 뉴질랜드와인전문가 과정, 캘리포니아와인전문가 과정 캡스톤(Capstone) 레벨1&2를 취득한 와인전문가입니다. 2018년부터 매년 유럽에서 열리는 세계최대와인경진대회 CMB(Concours Mondial De Bruxelles) 심사위원, 2017년부터 국제와인기구(OIV) 공인 아시아 유일 와인경진대회 아시아와인트로피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소펙사 코리아 한국소믈리에대회 심사위원도 역임했습니다. 독일 ProWein, 이탈리아 Vinitaly 등 다양한 와인 엑스포를 취재하며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미국, 호주, 독일, 체코, 스위스, 조지아, 아르메니아, 중국 등 다양한 국가의 와이너리 투어 경험을 토대로 독자에게 알찬 와인 정보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