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군 전차·장갑차를 비롯한 기갑장비들이 새롭게 변신한 모습이 포착됐다.
육군이 지난 1∼5일 주최한 군 문화축제인 지상군 페스티벌에 K-2 전차, K-21 보병전투차량 등이 포탑 위에 새장처럼 생긴 금속 구조물을 얹은 채 나타난 것이다.
이 구조물의 정체는 드론 공격을 저지하고자 만든 슬랫아머다. 철망을 기갑차량 외부에 둘러친 것으로, 외적 아름다움은 없는 기능 중심의 방어 장갑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확산된 드론 위협에 한국군이 대응하고 있다는 사실이 대국민 행사에서 드러난 셈이다.
◆기갑장비 약점을 싸고 빠르게 보호
예전에는 기갑장비에 철망을 설치하는 것은 후진국 군대에서 적용하는 임시방편으로 여겨졌다.
철망을 설치한 전차가 움직이는 닭장이나 새장처럼 보이는 것도 슬랫아머의 전면적 사용을 꺼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선진국 군대로 거리낌 없이 사용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교훈 때문이다.
전차는 지금도 지상전의 승패를 좌우하는 결정적 전력으로 여겨진다.
전차도 약점이 있다. 포탑 지붕이다.
예전에는 재블린이나 토우-2B처럼 고가의 상부공격 대전차미사일만 포탑 지붕을 노릴 수 있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군은 전차 포탑 상부에 슬랫 아머를 설치, 대전차미사일 공격을 저지하려 했다. 그러나 미사일의 강력한 위력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대당 가격이 500달러가 채 안되는 저가의 1인칭 시점(FPV) 드론과 쿼드콥터를 이용한 공격이 급증하면서 슬랫 아머의 가치가 달라졌다.
FPV 드론을 갖출 정도의 자금과 기술만 있으면 수십억원짜리 전차를 부술 수 있게 된 것이다.
드론 공격으로부터 전차를 보호하고자 우크라이나군은 다양한 경로로 슬랫 아머를 만들기 시작했다.
여단·연대별로 직접 용접해서 설치한 사례도 있다. 신속성이 뛰어나지만 부대별로 품질이 다를 수 있다는 지적이다.
우크라이나 기업 메틴베스트가 군 기술진과 함께 전차 종류별로 드론 공격에 취약한 부분을 분석, 규격형 슬랫 아머를 만들기도 했다. 승무원을 보호하면서 전차 운용에 지장을 받지 않게 하는 것이 목표다.
미국산 에이브럼스, 독일산 레오파르트, 옛소련 T-64·72 전차 등에 장착됐으며 장갑차에서도 쓰인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슬랫 아머는 진화를 거듭했다.
FPV 드론은 조종사의 숙련도에 따라 위력에 차이가 크다.
열린 해치를 통해 기갑차량 내부로 FPV 드론이 들어간 사례도 있다. 노련한 조종사라면 슬랫 아머의 빈틈을 찾아낼 수 있다는 의미다.
이 때문에 우크라이나군과 러시아군은 슬랫 아머를 극단적으로 강화한 형태를 선보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거북이 전차다. 전차 전체를 금속 틀과 강판으로 감싼 것이다.
러시아군이 이를 사용하는 모습이 드러난 시기는 2024년 4월 크라스노호리우카에서였다.
거북이 전차는 우크라이나 FPV 드론 공격을 저지하는데 효과가 있었다. 기존에는 1기로도 파괴가 가능했으나, 거북이 전차에 대해선 다수의 드론을 사용해야 했던 것이다.
우크라이나군은 고슴도치 전차를 만들었다. 기존 슬랫 아머에 강철 케이블, 철근, 철사 등을 용접하는 방식이다.
드론이 부딪히면 전차 차체 표면에서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지점에서 폭발하므로, 전차는 그만큼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우크라이나군 소속 레오파르트1A5 전차는 하루 동안 러시아군 드론 공격을 52차례나 받았으나 생존했다.
위장망을 비롯한 추가 방호수단들이 있었으나, 고슴도치 전차를 공격하려면 기존보다 더 많은 드론을 사용해야 한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한국군도 효과 있을까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부터 교훈 분석을 진행했던 군 당국은 드론처럼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효과를 거뒀던 장비의 사용을 늘리고 있다.
기갑장비의 포탑 상부에 철망을 얹는 슬랫 아머는 올해부터 육군 부대의 훈련 등에서 포착되어왔다. 하지만 지상군 페시티벌 같은 대국민 행사에서 이같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이례적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 러시아군 기갑부대는 재블린 대전차미사일과 RPG 로켓에 큰 피해를 입었다. 이후에는 FPV 드론 공격에 시달렸다.
대전차미사일과 FPV 드론 공격을 저지하는 최선의 방법은 능동방호체계(APS)다.
APS는 기갑차랑이 대전차 미사일, 드론 등의 공격을 받기 전에 센서로 날아오는 발사체를 탐지하고 능동적으로 무력화하는 최첨단 방어 시스템이다. 세계 각국에서 개발중인 차세대 전차·장갑차에는 APS가 필수품이다.
그런데 한국군 K-2 전차는 대전차미사일 등의 위협을 감지하면, 포탑 상부의 연막탄을 쏘는 방식이다.
이는 광섬유 FPV 드론처럼 전자전이 통하지 않는 무기에는 한계가 있다. K-1 전차, K-21 보병전투차량, K-9 자주포는 이같은 위협에 더욱 취약하다.
군 당국은 K-2 전차에 APS, 드론·급조폭발물 재머·원격사격통제체계(RCWS) 등을 탑재해 드론과 대전차미사일 대응 능력을 강화하는 성능개량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하지만 해당 계획은 2028∼2046년에 걸쳐 진행된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가해 드론·전자전 기술과 경험을 습득한 북한은 정찰·자폭 드론의 실전 적용과 대량생산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K-2 전차 성능개량 사업을 통해 방어력이 강화된 K-2 전차가 일정 수량 이상 배치되고, 드론·미사일 대응 능력을 갖춘 차세대 전차·보병전투차량이 등장할 때까지의 방호 공백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슬랫 아머는 이같은 공백을 메우는 대안이 될 수 있다.
철망은 야전에서도 용접이나 결속만으로도 장착할 수 있다. APS나 드론 재머처럼 개발·검증에 몇 년씩 걸리지도 않는다.
가격이 저렴해서 FPV 드론처럼 저가의 공격 무기를 막는데 효과적이다.
전자전을 극복하는 유도무기도 저지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선 광섬유를 이용해 표적까지 FPV 드론을 유도하는 기술이 널리 쓰이고 있다. 저가 자폭드론에 탑재가 가능한 대(對)전자전 장치도 개발되고 있다.
재머를 무력화하는 공격 무기도 저지하는 물리적 장벽의 존재는 승무원들에게 ‘안전하다’는 인식을 줌으로써 사기를 유지하고, 공격 측에는 계획보다 더 많은 타격 시도를 하도록 유도해서 드론을 소모시킬 수 있다.
단점도 있다. 북한군이 보유한 대전차미사일에는 슬랫 아머가 큰 효과를 발휘하기 어렵다.
특히 북한이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를 도운 대가로 최신 상부공격 대전차미사일 기술을 확보했다면, 슬랫아머의 효용성은 더욱 줄어들 우려가 있다.
전차 주포와 기관총 사격 및 승무원의 전장 인식 능력에 제약을 주지 않으면서도 방호력을 극대화하는 설계도 필요하다.
슬랫 아머를 포탑 위에 설치하면 전차 차체의 높이가 높아진다. 그만큼 적군에 포착될 위험도 커진다.
무게가 늘어남으로써 기어박스와 구동계에 부담이 증가하는 것도 문제다. 이같은 문제는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드러난 사례다. 이는 정비 소요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
슬랫 아머만으로는 기갑 장비를 온전히 보호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전파교란기와 APS, 위장망 등의 장비와 전차부대의 분산 및 은폐, 신속한 기동과 소규모 운용 등의 전술이 결합해야 슬랫 아머의 효과도 그만큼 높아진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자폭 드론과 대전차미사일 공격으로부터 기갑차량을 보호할 APS의 중요성을 재인식시켰다.
한국군도 K-2 전차에 APS를 장착하는 성능개량 사업을 추진하고 있고, 차세대 기갑차량들도 APS가 필수품으로 포함된다.
하지만 이같은 구도가 확립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 그때까지의 공백은 슬랫 아머처럼 단기적인 방식이 활용될 가능성이 있다.
한반도 유사시 북한군이 드론을 앞세울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지상군 페스티벌을 통해 육군이 공개한 슬랫 아머는 이같은 위협에 맞서려는 육군의 고민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앞으로도 주목할 요소라는 평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