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가 2023년 공개한 첫 대규모언어모델(LLM) ‘라마’의 논문 저자 14명 가운데 2025년 5월까지 회사에 남은 사람은 3명뿐이었다. 떠난 연구자 가운데 5명은 프랑스 파리의 미스트랄AI를 세우거나 합류해 초기 모델 개발에 참여했다. 유럽에서 교육받은 연구자가 파리에 있는 메타·구글 등 글로벌 빅테크 연구소에서 최첨단 모델 개발 경험을 쌓은 뒤 다시 유럽 스타트업의 창업자와 핵심 연구자로 이동한 것이다.
유럽에는 세계적 인재를 길러내는 대학뿐 아니라 글로벌 빅테크의 연구거점도 자리 잡고 있다. 이 연구소들이 현지 인재를 빨아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최첨단 모델 개발과 사업화를 경험한 연구자를 다시 유럽 창업 생태계로 내보내는 경력 사다리 역할도 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인재가 회사를 만드는 데까지는 성공하지만 이 기업을 세계적 규모로 키울 후기 자본과 연산 인프라가 부족하다. 미스트랄은 결국 모델 개발사를 넘어 직접 대규모 연산시설을 구축하는 사업에 뛰어들었다.
◆유럽의 빅테크 연구소가 창업 사다리로
미스트랄AI는 2023년 구글 딥마인드 출신 아르튀르 멘슈와 메타 출신 기욤 랑플·티모테 라크루아가 공동창업했다. 랑플과 라크루아는 첫 라마 논문의 저자였다. 이후 같은 논문에 이름을 올렸던 마리안 라쇼와 티보 라브릴, 밥티스트 로지에르도 미스트랄AI에 합류했다. 메타에서 라마 개발에 참여했던 연구진 일부가 파리에서 다시 모여 미스트랄·믹스트랄 계열 모델 개발에 나선 것이다.
세 창업자의 뿌리는 프랑스 대학과 연구기관이다. 멘슈와 랑플은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 공부했고 라크루아는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 출신이다. 멘슈는 구글 딥마인드 파리 연구소에서 일했고 랑플과 라크루아는 메타의 파리 AI 연구조직에서 대규모언어모델을 개발했다. 프랑스에서 교육받은 연구자가 생활 기반을 유럽에 둔 채 글로벌 빅테크의 최첨단 프로젝트를 경험한 뒤 그 경험을 다시 현지 창업으로 연결했다.
이 같은 순환의 기반에는 구글과 메타, 마이크로소프트 등이 유럽에 구축한 연구거점이 있었다. 파리와 런던, 취리히 등 대학과 연구기관이 밀집한 도시에 연구조직을 세우면서 유럽 연구자들은 미국 본사로 옮기지 않고도 글로벌 빅테크의 연산자원과 데이터를 활용해 최첨단 AI를 개발할 수 있었다.
영국의 딥마인드도 대표적이다. 2010년 런던에서 출발해 2014년 구글에 인수된 뒤에도 영국에 핵심 연구조직을 유지했고, 구글의 연산자원과 사업화 기반을 활용해 알파고와 알파폴드, 제미나이 등으로 연구 영역을 넓혔다.
스위스 취리히에서도 빅테크의 연구거점 확대가 이어졌다. 마이크로소프트는 2025년 새 AI 조직을 만들면서 구글 딥마인드 출신 연구자들을 창립 멤버로 영입했다. 기존에도 취리히연방공대(ETH)와 인력을 공유하며 현지 연구기반을 넓혀왔다.
미스트랄AI는 이런 인재 순환이 실제 기업 성장으로 이어진 대표 사례다. 2023년 설립 약 4주 만에 1억500만유로를 유치했고, 2025년 9월에는 17억유로를 추가 조달하며 117억유로의 기업가치를 인정받았다.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업체 ASML도 투자에 참여해 미스트랄의 AI 모델을 반도체 장비 연구개발과 운영에 활용하는 협력에 나섰다.
◆인재·창업은 美와 비슷… 성장자본·연산능력서 격차
유럽에 AI 인재나 신생기업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투자회사 프로서스와 데이터업체 딜룸이 2026년 집계한 유럽의 AI 전문인력은 약 32만5000명으로 미국과 비슷했다. 유럽과 미국에서 매년 새로 생기는 벤처투자 기반 AI 스타트업도 각각 약 900개로 큰 차이가 없었다.
격차는 기업을 대형 회사로 키우는 단계에서 벌어졌다. 유럽 AI 스타트업에 대한 초기 투자는 미국과 비교해 크게 뒤지지 않았지만 후기 투자에서는 격차가 급격히 벌어졌다. 유럽 AI 기업의 대규모 후기 투자에서 주도 투자자의 73%는 미국계였다. 유럽에서 AI 인재를 가장 많이 고용한 기업 15곳 가운데 6곳도 미국 빅테크였고, 유럽 기술기업은 한 곳도 포함되지 않았다.
유럽이 인재를 길러내고 스타트업을 만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들을 대형 기술기업으로 키우는 과정에서는 다시 미국의 자본과 기업에 의존하는 구조인 셈이다. 대규모 AI 모델 개발에 필요한 고성능 그래픽처리장치(GPU)와 데이터센터 등 연산 인프라도 유럽 기업이 넘어야 할 또 다른 장벽이다.
글로벌 기술투자회사 프로서스와 스타트업 데이터업체 딜룸은 공동 보고서에서 공개형 모델과 제조·금융·의료 등 산업별 AI, 월드모델 등을 유럽이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분야로 꼽았다.
파브리시우 블로이지 프로서스 최고경영자(CEO)는 “유럽은 세계적인 인재를 갖고 있지만 자체 연산자원과 공개형 모델에 빠르고 대규모로 투자하지 않으면 다른 지역에 의존하게 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성장 병목 직접 푼다… 미스트랄AI, 모델 학습서 연산망 구축까지
미스트랄AI는 부족한 연산 인프라를 직접 구축하는 쪽으로 사업 영역을 넓혔다. 2025년 6월 GPU와 오케스트레이션, 응용프로그램인터페이스(API), AI 제품·서비스를 하나로 묶은 ‘미스트랄 컴퓨트’를 발표했다. 기업이 직접 GPU와 데이터센터를 마련하지 않아도 모델 학습부터 실제 서비스 운영까지 할 수 있는 유럽 기반 연산환경을 제공하는 사업이다.
미스트랄 모델뿐 아니라 다른 기업의 공개형 모델도 같은 인프라에서 운영할 수 있도록 했다. 모델 회사가 자사 AI를 개발하는 데 필요한 연산자원을 확보하는 수준을 넘어 다른 기업과 연구기관에 GPU 기반 인프라를 제공하는 사업자로 영역을 확장한 것이다.
미스트랄AI는 장기적으로 유럽 내 AI 연산능력을 2030년까지 최대 1기가와트(GW) 규모로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여러 기업의 장기 연산 수요를 모아 이를 기반으로 데이터센터와 GPU 시설을 구축하고, 참여 기업에는 장기간 사용할 연산능력을 보장하는 방식이다.
유럽연합(EU)도 연산 인프라 확대에 나섰다. EU 집행위원회는 지난 7월 최대 7개의 ‘AI 기가팩토리’를 구축하는 사업 공모에 들어갔다. EU와 회원국이 최대 100억유로를 지원하고 민간에서 최소 200억유로의 투자를 끌어들여 대규모 AI 연산시설을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공모는 11월 마감되며 2027년 초 사업자를 선정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