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온에 방치한 밥을 다시 데워 먹은 20대 남성이 전신 발작과 심한 저혈당으로 쓰러진 뒤 간과 신장 기능까지 손상된 사례가 보고됐다.
의료진은 긴급 간 이식까지 검토했지만, 환자는 집중 치료 끝에 이식 없이 회복했다. 원인으로 지목된 것은 가열해도 쉽게 파괴되지 않는 식중독 독소 ‘세레울라이드’였다.
네덜란드 에라스무스 MC 로테르담 대학병원 연구진은 지난 5일, 국제학술지 ‘BMJ 증례보고(BMJ Case Reports)’에 이 같은 사례를 발표했다.
논문 제목은 ‘부적절하게 보관한 쌀 섭취 후 세레울라이드 생성 바실러스 세레우스와 관련된 전격성 다장기부전’이다.
◆30도 넘는 주방에 밤새 방치…다음 날 데워 먹어
환자는 특별한 병력이 없던 20대 남성이었다. 전날 조리한 쌀밥 요리를 주방에 그대로 뒀다가 다음 날 다시 데워 먹은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주방 온도는 30도를 넘었다.
남성은 식사 후 몸 상태가 나빠져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다음 날 아침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됐다. 전신 발작이 나타났으며 혈당은 심각하게 떨어진 상태였다.
병원 검사에서는 급성 간부전과 급성 신장 손상이 확인됐다. 혈액에 암모니아가 쌓이는 고암모니아혈증과 젖산이 증가해 혈액이 산성으로 변하는 젖산산증도 나타났다.
간과 신장을 비롯한 여러 장기의 기능이 급격히 악화되자 의료진은 긴급 간 이식 필요성을 평가했다. 치료에는 포도당 공급과 암모니아·글루타민 제거제 투여, 신장 기능을 대신하는 신대체요법이 동원됐다. 혈압과 호흡을 유지하기 위한 집중 치료도 이어졌다.
환자는 치료를 받으며 점차 호전됐다. 간과 신장 기능이 회복되면서 이식은 피했고, 연구진은 신경학적 기능도 회복됐다고 보고했다.
◆음식과 환자 혈액에서 같은 독소 검출
원인은 남성이 먹은 음식에 있었다. 의료진이 남은 쌀밥 요리와 환자의 혈청을 분석한 결과, 두 검체에서 모두 세레울라이드(cereulide)가 높은 농도로 검출됐다.
세레울라이드는 식중독균 바실러스 세레우스(Bacillus cereus)의 일부 균주가 만드는 구토형 독소다. 세포 안에서 에너지를 생산하는 미토콘드리아의 기능을 방해하며, 심한 경우 대사 장애와 간 손상을 일으킬 수 있다.
문제는 독소의 강한 내열성이다. 바실러스 세레우스는 토양과 농작물 등에 존재하며 쌀에도 섞여 들어올 수 있다. 밥을 짓는 과정에서 세균이 죽더라도 열에 강한 포자는 살아남을 수 있다.
이후 조리한 밥을 실온에 오래 두면 포자에서 나온 세균이 증식하면서 독소를 생성할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세레울라이드는 일반적인 조리 온도에서 쉽게 파괴되지 않는다.
가열해 세균을 죽여도 이미 만들어진 독소는 남을 수 있다. 실온에 오래 둔 밥을 프라이팬에 볶거나 전자레인지로 다시 데우는 것만으로는 독소를 없애기 어렵다.
◆대부분 하루 안에 호전…다장기부전은 드물어
바실러스 세레우스 식중독은 구토형과 설사형으로 구분된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따르면 구토형은 오염된 음식을 먹은 뒤 통상 1~6시간 안에 증상이 나타난다. 갑작스러운 메스꺼움과 구토가 대표적이다.
대부분은 24시간 안에 호전된다. 이번 사례처럼 급성 간부전과 신장 손상, 다장기부전으로 악화되는 경우는 드물다.
이번 연구는 환자 한 명의 치료 경과를 분석한 증례보고다. 실온에 둔 밥을 먹은 사람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중증으로 진행하는지는 이 연구만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같은 세균에 노출되더라도 증상과 중증도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가벼운 구토나 복통은 비교적 빠르게 가라앉을 수 있지만, 의식이 떨어지거나 발작이 나타나면 즉시 응급실에서 진료받아야 한다. 구토가 계속돼 물조차 마시기 어렵거나 심한 탈수 증상이 나타날 때도 진료가 필요하다.
◆밥은 1시간 안에 식혀 냉장…재가열은 한 번만
예방의 핵심은 조리한 밥을 어떻게 보관하느냐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조리한 음식을 실온에 오래 방치하지 말고, 따뜻한 음식은 60도 이상에서 유지하거나 차가운 음식은 5도 이하에서 보관하도록 권고한다.
영국 식품기준청(FSA)은 남은 밥을 가능한 한 빨리, 되도록 조리 후 1시간 안에 식혀 냉장 보관하고 24시간 이내에 먹도록 안내한다.
밥을 한꺼번에 많이 지었다면 작은 용기에 나눠 담아 식히는 것이 좋다. 양이 많을수록 가운데까지 식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밥솥이나 냄비에 담긴 채 실온에서 천천히 식히는 방법은 피해야 한다. 바로 먹지 않을 밥은 신속히 식혀 냉장고에 넣는 게 안전하다.
냉장 보관한 밥을 다시 먹을 때는 전체에서 김이 날 정도로 충분히 뜨겁게 가열하고, 재가열은 한 번만 해야 한다.
실온에 오래 방치해 독소 생성이 우려되는 밥은 다시 끓이거나 볶아 먹지 말고 버려야 한다. 연구진은 이번 사례를 통해 부적절하게 보관한 쌀밥 등 전분이 많은 음식이 심각한 세레울라이드 중독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