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발발 후 4년8개월 가까이 계엄령이 발동 중인 우크라이나의 정치 현실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의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할 것인가. 러시아가 젤렌스키의 정통성을 문제 삼은 데 이어 미국도 비슷한 시각을 드러내는 등 젤렌스키의 입지가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0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젤렌스키는 이(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여러 번 끝낼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며 “당장 (대통령을)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전날(9일) 트럼프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전화 통화에서 ‘러시아 경유의 미국 및 세계 시장 공급’에 전격 합의한 점을 젤렌스키가 비난한 지 하루 만에 나왔다. 젤렌스키는 트럼프를 겨냥해 “푸틴에게 선물을 줬다”며 “끝내야 할 전쟁의 장기화에 투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성토했다.
이를 불쾌하게 여긴 트럼프는 “우크라이나에 (종전) 합의를 할 수 있는 새 지도자를 뽑을 것을 제안하고 싶다”며 “우크라이나는 새 대통령을 맞이할 때가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크라이나는 국토의 30%를 (러시아에) 잃었고 100만명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는 이유를 들었다. 젤렌스키는 실패한 전쟁 지도자란 뜻으로 풀이된다.
우크라이나 헌법상 대통령 임기는 5년이고 연임이 가능하다. 따라서 2019년 5월 취임한 젤렌스키는 2024년 5월 임기가 끝났다. 연임에 도전해 성공한 것도 아닌데 임기 만료 후 벌써 2년5개월가량 대통령으로 추가 재임 중이다. 이는 계엄령 하에서는 선거를 치를 수 없도록 한 우크라이나 헌법 조항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는 2022년 2월 러시아군의 침략 직후 계엄령을 선포했으며, 이 같은 상태는 벌써 4년8개월 가까이 계속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새 대통령’에 관한 트럼프의 언급은 진작 임기가 끝났고 그렇다고 재선된 것도 아닌 젤렌스키의 대통령직 수행이 과연 적법한가, 하는 의문을 던진 것이다.
러시아 정부는 즉각 환영했다. 푸틴의 해외투자·경제협력 특사인 키릴 드미트리예프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글에서 트럼프의 발언을 “상징적이고 역사적”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그러면서 “우크라이나에는 ‘전쟁광’ 말고 평화에 초점을 맞춘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는 곧 러시아 대통령실 크레믈궁의 입장이기도 하다. 푸틴은 앞서 여러 차례 “(대통령 임기가 끝난) 젤렌스키는 우크라이나를 대표해 러시아와 종전 협상에 나설 자격이 없다”며 우크라이나에 새 지도자 선출을 요구한 바 있다.
반면 우크라이나 정부는 발끈했다. 안드리 시비하 외교부 장관은 SNS를 통해 “젤렌스키 대통령은 독립과 자유, 존엄을 위한 전쟁의 시기에 나라를 이끌고 있다”고 트럼프 발언을 반박했다. 이어 “우크라이나 국민은 자기 결정권이 있다”며 “그(젤렌스키 대통령)는 우크라이나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유럽 주요 국가들 중 젤렌스키의 정통성은 문제 삼은 나라는 한 곳도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