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웅의역사산책] 이봉창, 평범과 비범의 한끝 가르다

신일본인 꿈꾸다 냉혹한 식민지 현실 마주해
부조리 맞선 인간적 욕망, 독립운동으로 승화

1932년 9월30일 오전 9시, 도쿄 대심원 형사 제1호 대법정에서 이봉창이 사쿠라다몬 밖(櫻田門外) 대역사건을 이유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는 기사가 ‘대역사실개요’, 이봉창의 사진과 함께 모 신문 10월1일자에 실렸다. 재판 개시부터 사형 선고까지 걸린 시간이 단지 15분에 지나지 않았음도 넌지시 흘렸다. 이어서 10월10일 오전 9시2분에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후속 보도가 나왔다. 이봉창이 1932년 1월8일 사쿠라다몬 인근에서 육군 관병식을 마치고 궁성으로 귀환하던 일왕을 향해 폭탄을 투척했다는 보도가 나온 이래 10개월이 흐른 시점이었다. 이 사이에 그의 인적 사항과 구체적 행적이 재판 소식을 전하는 과정에서 세상에 알려졌다.

필자가 이봉창을 인지한 시점은 매우 이른 나이였다. 무엇보다 백범 김구가 1946년 7월 그의 유해를 안장한 효창공원 근처에 살면서, 어른들로부터 그의 의거에 관한 이야기를 윤봉길의 의거와 함께 숱하게 들으며 성장했기 때문이다. 특히 그가 금정(현 효창동)에서 살았으며 필자 주변의 보통학교를 졸업했다는 사실 그리고 용산역에서 철도 선로의 방향을 바꾸는 하위직 전철수(轉轍手)로 취직하여 근무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는 필자에게 평범한 동네 아저씨로 다가왔다.

김태웅 서울대 명예교수·역사교육

그런데 어린 나이에도 윤봉길의 의거와 비교하여 궁금증이 들기 시작했다. 윤봉길은 위인전에서 자주 언급하듯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의협심과 강인한 독립정신을 갖추었으며 청년 시절에는 농촌계몽운동을 벌일 정도로 비범한 인물로 묘사되었기에, 그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의거는 당연하게 수긍이 갔다. 반면에 이봉창은 위인전 하나 제대로 나오지 못할 정도로 너무나 평범한데, 어떻게 목숨을 걸고 일왕에게 폭탄을 투척할 만한 청년으로 성장했는지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이에 필자는 훗날 이봉창의 성장 과정과 고뇌에 관한 글들을 읽으면서 인간 이봉창에게 매료되었다. 특히 일제하 평범한 청년이라면 누구나 꿈꾸었듯 일본어에 능숙한 신일본인이 되어 호의호식하고자 했던 그의 욕망이, 어느 날 갑자기 그를 이른바 대역죄인으로 변신케 했을까. 그는 신문(訊問)과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변신의 계기로 일왕 즉위식 때 겪었던 참담한 일을 들었다. 그의 진술인즉슨, 1928년 11월 오사카에서 노동 일을 하던 친구들과 함께 교토에서 거행되는 일왕의 즉위식을 참관하러 갔다가, 검속에 걸려 11일 동안 유치장 신세를 졌다는 것이다. 검속 이유는 그의 호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고향에서 온 한글 섞인 편지 때문이었다. 이후 그토록 숨기고자 했던 조선인이라는 사실이 탄로 나면서 주변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한 뒤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이 ‘조선인’임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늘 차별을 겪으면서도 일본인이 되고자 했던 노력이 현실의 구조적 장벽과 일상적 차별 앞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따라서 그의 욕망도 즉자적(卽自的) 욕망에서 대자적(對自的) 욕망으로 바뀌었다. 어쩌면 인간은 합목적적인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려는 불합리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욕망이 세상의 부조리와 부딪치면서, 그는 ‘평범’에서 ‘비범’으로 비약한 것이리라. 이에 필자는 그의 평범하고도 비범한 삶을 되돌아보는 가운데 평범에서 비범으로의 변신을 꿈꾸었다. 물론 그것은 몸이 아닌 머리로 하는 상상에 불과하여, 어느 시점에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김태웅 서울대 명예교수·역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