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핸들이 고장 난 8t 트럭.”
2인조 힙합 그룹 ‘다이나믹 듀오’가 2005년 발표한 노래 ‘고백(Go Back·돌아가다)’의 한 구절이다. 20대 중반의 방황을 그린 이 곡은 “이건 슬픈 자기소개서”라는 말로 시작한다. 가사 속 화자는 스물여섯 번째 생일을 맞아 넓어지는 이마를 걱정하고, 음악을 붙잡고 사는 불안을 털어놓는다. 월세살이에 지쳐 빨리 집을 사고 자리를 잡고 싶다는 바람도 내비친다. 21년 전 노래지만, 그 속의 고민은 현재 청년들의 사정과 다르지 않다.
래퍼 크루셜스타(박세윤·37)는 지난해 발표한 ‘Man’s Fear’(남자의 두려움)란 곡에서 “낭만이 내주진 않지 월세”, “센 척을 해보지만 미래에 대한 걱정이 내 머리에 가득해”라는 가사를 썼다. 래퍼 릴재우(조재우·28)도 같은 해 ‘내가 공무원이었다면’에서 “현대백화점 10층에 가서 영화를 보기보다는 7층의 가구를 고르고팠어”라고 노래했다. 비싼 월세를 감당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안정적인 미래를 꾸리는 일은 20년이 지나서도 청년의 걱정으로 남아있다.
청년 래퍼들이 가사에 가장 많이 담는 이야기도 지금 자신의 삶이었다. 세계일보가 8월20일부터 9월21일까지 한 달 동안 청년 래퍼 8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가사에 주로 담는 이야기’(최대 3개 선택)를 물었다.
그 결과 65명(81.3%)이 ‘나의 삶과 경험’을 선택했다. ‘꿈과 목표’(43명·53.8%), ‘사랑과 인간관계’(42명·52.5%)가 그 뒤를 따랐다. ‘감정(불안·우울·분노 등)’을 고른 사람도 28명(35%)에 달했다. 반면 ‘성공과 부’를 선택한 사람은 12명(15%), ‘실력 과시·경쟁’은 7명(8.8%)에 그쳤다. 돈과 명성을 드러내고 경쟁자를 공격하는 힙합의 익숙한 이미지와 달리, 응답자들이 주로 가사로 쓴다고 밝힌 것은 일상의 경험과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었다.
현재를 살아가는 청년 래퍼가 성공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다. ‘쓰고 싶었지만 아직 쓰지 못한 이야기’를 묻자 80명 중 35명이 답했는데, 이 가운데 7명이 성공이나 과시를 꼽았다. 활동 3~5년 차인 20대 초반 남성 래퍼는 쓰지 못한 이야기로 “자신감 있게 하는 성공의 이야기”를 들고, 이유를 “아직 성공을 못 했다”고 적었다. 1~2년 차인 20대 후반 남성 래퍼는 “아직 성공 못 했고 거짓을 말하고 싶지 않다”고 답했다. 3~5년 차인 30대 후반 남성 래퍼는 ‘플렉스(flex·자랑하다)’와 실력 과시를 잘 못 쓰는 이유를 “지금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느껴서”라고 했다. 1~2년 차인 20대 초반 남성 래퍼는 높은 곳의 이야기를 쓰고 싶지만 자기 위치를 잘 알기에 늘 낮은 곳의 이야기만 쓰게 된다고 털어놨다.
가족과 친구를 다룬 이야기는 힙합에서 쉽게 볼 수 없었다. 12일 세계일보가 1990년 이후 한국힙합 주요 4008곡의 가사를 분석한 결과, 연애와 이별을 다룬 사랑은 평균 17%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반면 가족·친구를 다룬 가사는 3.1%로 사랑의 5분의 1 수준이었다.
지금의 청년 래퍼들에게도 가족은 쉽게 꺼낼 수 있는 소재가 아니다. 가사에 주로 ‘가족을 담는다’는 사람은 80명 중 2명(2.5%)뿐이었다. 그러나 아직 쓰지 못한 이야기엔 35명 가운데 6명이 가족을 꼽았다.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쓰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활동 3~5년 차인 20대 후반 남성 래퍼는 “가족. 소중하다 보니 어렵다”는 의견을 남겼다. 활동 1년이 안 된 10대 남성 래퍼는 “쓰고 싶지만, 가족 얘기를 하면 마음이 아파 못 쓴다”고 적었다.
취재=조병욱·배주현·정세진 기자,
사진=최상수 기자, 편집=이대용 기자,
미술=권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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