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dak 필름 한 롤 서른여섯 번의 셔터를 누르며 사진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카메라에 표시된 필름 카운터가 25 정도가 되면 고민이 시작됐다. 필름을 새걸로 갈아야 하나 남은 거로 찍어도 될까? 제한된 서른여섯 번의 셔터를 누르는 순간의 신중함과 긴장감, 설렘은 지금의 디지털카메라 시대에는 느낄 수가 없는 감정이다.
사진기자는 본인이 취재했던 사진을 나름의 방식으로 보관한다. 개인의 차이는 있지만 나는 사진의 중요도를 떠나 보관을 많이 하는 사진기자이다. 역사의 중요했던 순간도 있었고, 상황이 기억도 없는 시답지 않은 사진도 있다.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담은 기념사진도 있고 취재와 출장 중에 보이는 나의 모습도 있다.
아주 먼 옛날의 모습은 아니지만 타임머신을 타고 열어본 나의 외장하드를 독자들과 같이 꺼내보고 추억하는 시간을 가져보려 한다.
2026년 10월 13일, 장이 열리자마자 3.10% 내린 6,186.08로 출발한 코스피 지수는 한때 5,950.00(-6.80%)까지 밀렸다. 이에 유가증권시장에선 매도 사이드카가 발동되며 5분간 프로그램 매수 호가 효력이 정지되기도 했다 지난 2일 7,003.74로 마감, 9월 하순 이후 처음으로 종가 기준 '7천 피'를 회복했던 코스피는 이후 이날까지 5거래일 연속으로 하락 중이다.
인공지능(AI) 인프라 투자 둔화 우려가 재점화한 가운데 코스피가 불과 5거래일 만에 1천 포인트 넘게 빠지며 '날개 없는 추락'을 이어가고 있다.
시간을 거슬러 2001년 4월 3일, 서울 명동 삼성증권 앞 게시판과 또 다른 사진에는 객장에 모인 투자자들이 담겨 있다. 팔짱을 낀 남자, 입술을 굳게 다문 사람, 안경 너머로 한곳을 응시하는 얼굴. 저마다 자세는 달라도 표정은 무겁다. 누구의 투자금이 얼마였는지, 어떤 종목을 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모습이 시장의 긴장을 전한다.
주가 전광판 앞에서 한 남자가 담배를 입가에 댄 채 서 있다. 유리에는 그의 얼굴이 겹쳐 비친다. 시선이 머무는 곳에는 ‘종합주가지수 501.26’, ‘전일대비 -13.94’라는 숫자가 떠 있다. 지수는 가까스로 500선 위에 걸려 있지만 다시 내려갈지 모를 순간이다. 뒷모습과 유리에 비친 표정 사이로 그날의 불안이 읽힌다.
당시에 주가 취재는 객장에 직접 가서 취재를 해야 했다. 상승장이면 문제가 없었지만 하락장에 가면 사진기자들은 투자자들의 거친 항의를 받고는 했다. 객장 풍경에도 시간이 쌓여 있다. 손안의 화면으로 시세를 확인하는 지금과 달리, 사진에서는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 모여 시장의 움직임을 지켜본다. 앞쪽의 모니터와 뒤편 투자자들의 얼굴, 유리 위 증권사 이름이 한 화면에 겹친다. 전광판 앞 남자의 담배도 당시 풍경의 한 조각이다. 오래된 필름 사진은 주가뿐 아니라 사람들이 불안을 견디던 자리까지 남겨 놓았다.
당시 국내 증시는 미국 증시의 약세와 엔화 가치 하락, 원·달러 환율 상승이 겹치며 흔들렸다. 외국인 매도세까지 더해진 이날 종합주가지수는 장중 499.71까지 내려갔다. 지난해 12월 21일 이후 처음으로 500선 아래로 밀린 것이다. 당시 심리적 지지선으로 여기던 500이란 숫자가 무너지자 투자자들의 불안도 커졌다.
이날 지수는 기관과 개인의 매수세에 힘입어 503.26으로 거래를 마쳤다. 전날보다 11.94포인트, 2.32% 하락한 수치였다. 종가로는 500선을 지켰지만 안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다음 날인 4월 4일에는 493.69로 마감하며 끝내 500선 아래로 내려앉았다. 사진은 그 하루 전, 버티고 있던 경계가 흔들리는 순간을 붙잡았다.
‘500선 붕괴’는 당시 신문 제목이자 주식시장의 큰 사건이었다. 하지만 사진을 다시 펼치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숫자보다 사람이다. 팔짱을 낀 자세와 굳은 입매, 유리에 비친 얼굴은 하락장의 무게를 말없이 보여 준다. 사진 밖에서 이들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는 기록돼 있지 않다.
25년이 지난 지금, 외장하드 속 두 장의 사진은 묻는다. 시장의 등락을 숫자로만 기억하고 있지는 않은가. 매일 바뀌는 지수 뒤에는 저마다의 기대와 걱정이 있다. 그날 500선 앞에 멈춰 섰던 사람들의 표정은, 경제의 기록이 곧 삶의 기록임을 조용히 일깨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