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1시간은 평등… 돌봄 품앗이로 복지한계 보완” [차 한잔 나누며]

손서락 타임뱅크코리아 대표

‘쓸모없는 사람은 없다’ 구호 기반
돈 대신 시간 교환하며 서로 도와
발달장애 청년들 참여 많아 눈길
알코올 중독자·고립 노인 등 변화
“모두의 1시간은 평등하다는 데에서 출발해요. 그게 이재용 회장이든 발달장애인이든지.”


14일 서울 서대문구 타임뱅크하우스에서 만난 손서락 타임뱅크코리아 대표는 타임뱅크의 핵심 철학을 이같이 설명했다. ‘타임뱅크’는 돈 대신 시간을 주고받는 일종의 ‘시간 품앗이’ 운동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 1시간을 일하면 1시간의 시간화폐가 적립되고, 이를 활용해 자신에게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손서락(가운데) 타임뱅크코리아 대표가 14일 서울 서대문구 타임뱅크하우스에서 오목으로 맺어진 발달장애인 청년과 노인의 우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최상수 기자

사무실 한쪽 벽에 걸린 월간 계획표에는 ‘쓸모없는 사람은 없다’는 구호와 함께 바둑·장기, 기타, 글쓰기, 민요, 노래, 그림 등 다양한 일정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모두 타임뱅크 참여자들이 서로의 시간을 나누며 만들어낸 활동이다. 현재 가장 많은 시간화폐를 모은 사람은 한 발달장애인 청년이다. 그만큼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기꺼이 내어준 셈이다.

손 대표가 타임뱅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요양병원 컨설팅 과정에서 시장경제에 기반한 돌봄의 한계를 절감하면서다.



병원이 수익을 추구할수록 정작 본질인 ‘돌봄’은 뒷전으로 밀려나는 현실을 목격했다. 오랜 고민 끝에 그가 찾은 해답이 바로 김요나단 신부가 2005년 국내 처음 도입한 타임뱅크였다.

누구의 노동이든 ‘동일한 1시간’으로 인정한다는 개념은 시장경제 관점에서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손 대표는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는 ‘호혜경제’의 관점에서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고 설명했다. 자신이 가진 능력을 나누고, 대신 자신에게 없는 능력을 다른 사람에게서 제공받는 일종의 교환이라는 것이다.

손 대표는 “누군가는 오목을 둘 줄 알고, 누군가는 모닝콜을 할 수 있다”며 “우리가 주목하지 않던 가치를 인정해주는 것에서 선순환이 시작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러한 호혜경제가 기존 복지체계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는 데 익숙해진 사람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경험을 통해 자신의 ‘쓸모 있음’을 깨닫고 자부심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손 대표는 “일방적 지원은 결국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며 “이를 서로 돕고 돕는 순환으로 돌리면 복지 비용과 더불어 각종 사건·사고에 들어가는 갈등 비용 등을 줄일 수 있다”고 했다.

이 같은 믿음은 지난 10년간 소외된 이웃들의 변화를 지켜보며 굳어졌다.

노인과 장애인 등이 타임뱅크를 통해 도움을 ‘받는’ 사람에서 ‘주는’ 사람으로 바뀌고, 인간관계를 회복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

한 기초생활수급자 노인이 대표적이다.

“나는 할 줄 아는 게 없다”던 노인에게 오목을 둘 줄 아느냐고 묻자 “그건 당연히 할 줄 알지”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마침 함께 오목을 둘 사람을 찾던 발달장애인이 있었고, 두 사람은 오목을 두며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됐다.

평생 건설현장에서 일하며 술에 의존하던 70대 노인도 타임뱅크에 참여한 뒤 달라졌다. 미술 수업에서 그림 그리는 즐거움을 발견한 뒤 술 대신 그림에 몰두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무실 한쪽 벽에는 그의 풍경화 여러 점이 걸려 있었다.

손 대표는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던 어르신이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된 것”이라며 “자신도 다른 사람을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부심을 느끼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고 했다.

이러한 경험은 손 대표에게 ‘돌봄은 결국 친구를 만드는 일’이라는 확신을 심어줬다. 그는 “1인 가구가 늘어나는 것은 사람들과 교감하면서 배우는 소통과 공감의 기회가 줄어드는 문제를 유발한다”며 “공동체 안에서 서로 연결되고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사회가 기회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에는 ‘고립·은둔 청년’을 위한 타임뱅크 프로그램도 시작했다. 학교폭력이나 따돌림 등으로 인간관계에 상처를 입고 타인과의 접촉을 꺼리는 청년들이 다시 세상과 연결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다. 손 대표는 고령화와 저출생, 1인 가구 증가, 사회적 고립 등 복합적인 사회문제에 대응하려면 복지의 패러다임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활용하지 못했던 무수한 시간들이 있다”며 “그 시간들을 사회적 자원으로 바꿀 수 있는 답을 타임뱅크가 갖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