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전반을 살아가는 지금 돌아보면, 20세기는 공산주의가 인류를 가장 강하게 매혹한 시대였다. 공산주의는 착취와 불평등을 없애고 누구나 자유롭고 풍요롭게 사는 이상사회를 약속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오히려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국가와 당에 권력을 집중시켰다. 북한에서는 수령 한 사람을 절대자의 자리에 올려놓고 우상화하기에 이르렀다.
의사이자 통일사상을 체계화한 사상가 이상헌(李相憲·1914~1997)은 이러한 실패의 더 깊은 뿌리를 하나님을 부정한 철학적 출발점에서 찾았다. 그에게 하나님은 종교적 믿음의 대상에 머물지 않았다. 인간과 자연을 존재하게 한 근원이자 사랑과 양심의 출발점이며, 국가와 당도 침해할 수 없는 인간 존엄의 근거였다. 공산주의는 인간해방을 약속했지만, 정작 인간을 물질과 계급으로 설명하면서 그 근원을 놓쳤다고 본 것이다. 하나님을 지운 사상이 끝내 인간의 자유와 존엄까지 빼앗았다는 것이 그의 비판이었다.
결국 1989년 동유럽 공산정권이 잇따라 무너지고, 1991년에는 소련이 해체됐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중국·베트남·라오스·북한·쿠바 등에서는 여전히 공산주의 계열의 일당 지배체제가 유지되고 있으며, 그 인구는 세계 인구의 약 5분의 1에 이른다. 자유민주사회에서도 불평등과 소외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이를 외면해서는 안 되지만, 부유층 전체를 적으로 돌리거나 국가권력으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방식에서 해법을 찾아서도 안 된다. 한국 역시 공익과 개혁을 명분으로 국가권력이 개인의 자유를 과도하게 제한하지 않는지 살펴야 한다. 인간해방을 약속한 사상이 인간을 억압한 역사를 되짚는 것은, 어떤 이념과 권력도 인간 위에 군림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자유와 평등을 함께 지키면서 불평등과 소외를 해결할 길을 찾기 위해, 지금 이 시점에 공산주의의 약속과 실패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을 지운 공산주의’는 이상헌의 강연과 저술, 논문, 증언 등을 토대로 한 연재물이다. 이 연재는 과거의 실패를 비판하는 데 머물지 않고, 자유와 존엄이 보장되고 사랑과 책임으로 함께 살아가는 인류의 미래사회를 모색하려는 시도다. 공산주의가 어떻게 등장해 인류를 매혹했고, 어떤 과정을 거쳐 인간을 억압하는 체제로 변했는지를 되짚어본다. 아울러 이상헌이 공산주의의 대안으로 제시한 통일사상을 살펴보고, 하나님주의를 바탕으로 인간의 자유와 존엄, 책임과 사랑을 회복해 나갈 길을 모색하고자 한다. 하나님을 되찾는 것은 인간을 권력과 이익의 수단으로 삼지 않고, 사랑과 양심에 따라 사람과 자연을 대하며,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사회질서를 세우는 일이기도 하다. <편집자주>
유물론 너머 사랑의 근원을 찾다
이상헌은 공산주의야말로 민족해방과 인간해방을 이룰 사상이라고 믿었다. 감옥과 고문조차 그의 확신을 꺾지 못했다. 하지만 사상을 깊이 연구할수록 한 가지 근본적인 의문에 휩싸였다. 자신을 이끌어온 민족애와 인류애, 동료를 위해 희생을 무릅쓰게 한 사랑의 근원은 무엇인가. 애초에 독립운동도, 공산주의 운동도 모두 이 사랑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었던가.
공산주의의 철학적 토대인 유물론(唯物論)은 우주와 인간의 근본을 이루는 것이 정신이나 신적(神的) 존재가 아니라 물질이며, 인간의 의식과 사상도 물질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러한 설명만으로 사랑과 희생의 근원을 충분히 밝힐 수 없었다. 의문만 더할 뿐이었다.
물질에서 인간을 찾은 유물론
물론 공산주의자들에게도 강한 동지애와 연대의식은 있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한 데에도 인간 소외에 대한 문제의식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만들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마저 돈의 관계로 바꾸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상헌이 묻고자 한 것은 사랑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그 근원이었다.
인간이 물질적 존재에 불과하고 정신이 물질에서 생겨난 부수적 현상이라면, 양심이나 사랑도 결국 물질적 조건의 산물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조건이 달라지면 사랑의 가치도 달라지는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자기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에도 선(善)을 선택하며,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마음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계급적 연대만으로는 그에 대한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같은 계급에 속한 사람끼리 협력하는 것은 공동의 이해관계로 수긍할 수 있다. 노동자가 단결해 자본가에게 맞서는 것도 계급의 이익이라는 목적이 있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를 위해 목숨을 내놓고,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하려고 자신의 몸을 던지며, 원수까지 용서하는 사랑은 계급적 이해관계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더욱이 계급을 기준으로 사랑의 범위를 나누면 사랑은 쉽게 증오와 동행하게 된다. 나아가 노동자계급에 대한 사랑이 자본가계급에 대한 적개심과 결합할 수 있다. 혁명의 목적을 위해 상대를 제거하는 행위까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다. 이상헌은 만인의 해방을 내세웠던 사상이 오히려 사람을 동지와 적으로 갈라놓는 모순에 주목했다. 그는 계급적 사랑은 결코 모든 인간을 품을 수 없다고 확신했다.
공산주의 역시 인간의 고통을 낳는 외부의 구조에 날을 세웠고, 착취가 어떻게 생겨나고, 노동자가 왜 소외되는지를 밝혀내려 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이 왜 이기심을 버리지 못하는지, 불평등한 구조를 없앤 뒤에도 왜 권력욕과 지배욕은 되살아나는지에 대해서는 끝내 답을 주지 못했다. 사유재산을 없애고 생산관계를 바꾸면 새로운 인간이 탄생할 것이라고 믿었지만, 인간에게는 언제든지 권력욕과 지배욕이 다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것이다.
희생의 근원을 찾아 종교로 향하다
이상헌에게 이것은 이론적 결함만이 아니었다. 사회를 바꾸려는 사상이 인간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한다면, 그 사상에 기초한 사회 역시 인간을 온전히 구할 수 없는 것이다. 제도가 아무리 평등해도 그것을 움직이는 사람의 마음에 탐욕과 증오가 남아 있다면 새로운 억압은 다시 생겨날 수밖에 없다. 착취의 주체만 바뀐 채 또 다른 착취가 되풀이될 수 있는 것이다.
의사였던 이상헌은 인간의 육체를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들여다본 사람이었다. 몸이 병들면 정신도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인간의 모든 생각과 감정을 육체의 작용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도 깨닫고 있었다. 환자를 살리려는 의사의 책임감, 고통받는 사람을 외면하지 못하는 연민, 자신의 안위보다 옳은 일을 앞세우는 양심은 물질적 이해득실만으로 헤아리기 어렵다.
그가 보기에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생명을 지키려는 욕망과 함께 자신을 뛰어넘어 다른 사람에게 향하려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받기보다 주면서 기뻐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먼저 희생하면서 오히려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은 단지 생존본능이나 계급의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힘이었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질은 물질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닐 수 있다. 사랑과 양심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그 본성의 근원이 있어야 했다. 이상헌의 질문은 여기에서 종교로 향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존재라면, 인간 안의 사랑은 하나님에서 비롯된 것으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내놓는 마음은 물질적 이익에 반하는 예외적 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본래 지닌 성품의 발현이다.
계급을 넘어선 사랑의 근원
이상헌이 공산주의를 비판하게 된 출발점은 반감이나 증오가 아니었다. 오히려 공산주의가 품었던 인간해방의 열망을 끝까지 실현하려는 데 있었다. 나아가 공산주의가 발견한 가난과 착취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을 물질과 계급의 관계만으로 바라보는 한계를 넘어서고자 했던 것이다. 이상헌에게는 사회구조의 변혁뿐 아니라 인간 마음의 변화까지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이 필요했다.
유물론은 인간의 삶을 설명할 때 물질적 조건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이상헌이 찾고자 한 것은 인간이 무엇을 위해 사는지, 왜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지에 대한 답이었다. 그가 보기에 사랑은 물질에서 우연히 생겨난 감정이 아니었다. 사랑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근원에 놓인 힘이었다. 하나님을 지운 유물론은 이러한 사랑의 출발점을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글 싣는 순서>
①조국을 되찾으려던 청년
②유물론이 놓친 사랑
③공산주의의 유혹, 종교의 빈틈
④마르크스가 찾던 인간
⑤인간소외의 뿌리
⑥투쟁을 넘어 사랑으로
⑦물질 너머의 근원을 묻다
⑧붕괴 전에 울린 조종(弔鐘)
⑨실패를 낳은 이론
⑩주체사상, 자주가 복종이 되다
⑪민주주의를 이용한 공산주의
⑫실패하고도 고개를 들다
⑬체제는 무너져도 원한은 남는다
⑭폭력의 혁명, 사랑의 혁명
⑮사랑으로 세우는 새 질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