겹겹이 쌓인 원에 담긴 존재의 의미…성지영 작가 첫 개인전 ‘유무상화'

화폭을 채운 붉은색과 주황색 사이로 노란 원들이 겹겹이 번져 나간다. 가까이 들여다보면 크고 작은 원이 포개지며 꽃처럼 피어나는 모습이다. 성지영 작가의 작품 ‘단심’(2026)이다.

 

‘단심’(2026). 작가 제공

성 작가는 다음달 11일부터 16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 갤러리 라메르에서 열리는 첫 개인전 ‘유무상화(有無相和)’에서 100호 이상의 대형 신작을 비롯해 회화 30여점을 선보인다.

 

‘유무상화’는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조화를 이룬다는 뜻으로, 작가가 자신의 작업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말이다. 노자의 ‘유무상생(有無相生)’에서 출발했지만, 존재와 비존재가 서로를 규정한다는 관계를 넘어 둘의 조화에 주목했다. 작가는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이 경계를 넘어 화합하는 상태를 ‘유무상화’라고 설명한다.

 

이를 표현하는 조형 언어는 ‘원’이다. 작가는 캔버스 위에 아크릴 물감을 얇게 올리고 수많은 원을 반복해서 그린다. 투명하게 비치는 색과 겹쳐진 윤곽이 화면에 깊이와 리듬을 만든다. 푸른 원들이 물결치는 듯한 ‘희망’, 초록과 노랑이 어우러진 ‘수선화 #2’ 등에서도 같은 기법을 볼 수 있다.

 

‘수선화 #1’(2026). 작가 제공
‘수선화 #2’(2026). 작가 제공

작가는 아크릴 물감에 물을 섞어 수채화처럼 투명한 효과를 내고, 연한 색에서 진한 색으로 원을 여러 겹 쌓아 올린다. 원의 크기와 밝기, 색채의 농도를 달리하면서 단순한 반복에서 벗어나 화면에 율동감을 만들어낸다. 물감이 쌓여 만들어지는 질감과 번지고 스며드는 색채의 대비 역시 존재와 비존재를 표현하는 방식이다.

 

작품의 색채에는 어린 시절의 기억도 담겨 있다. 작가는 유년 시절 할머니와 함께 지냈던 논산평야의 자연이 색채 선택에 중요한 영향을 줬다고 설명한다. 붉게 물든 노을과 황금빛 들판, 파란 하늘과 초록 정자나무 등 어린 시절 마주했던 자연의 색을 다양한 유사색으로 혼합해 화폭에 담아냈다는 것이다.

 

‘희망’(2026). 작가 제공

작가에게 원의 반복은 단순한 표현 기법을 넘어 시간과 내면의 에너지를 축적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작가는 원을 그리는 행위를 기도에 비유한다. 반복적으로 원을 그리면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거친 마음을 다듬어 조화로운 삶에 이르고자 한다는 것이다. 작업노트에서 “나는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기 위해 보이는 것을 그린다”고 설명한 이유다.

 

일본 갤러리 비카라의 야기하시 요시오 아트디렉터는 겹겹이 반복된 원들이 우주의 광활함과 미세한 세포의 움직임을 함께 떠올리게 한다고 평했다. 그는 크고 작은 원의 반복과 색채의 농담이 공간적 깊이를 만들어내며, 화면에서 생명의 움직임이 느껴진다고 분석했다. 야기하시 아트디렉터는 약 10년 전 성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했을 당시와 비교해 2023년 이후 작품에서 기술적 발전과 함께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정신성이 드러난다고 평가했다. 특히 2024∼2025년부터는 수많은 원으로 이루어진 추상적 화면에 꽃이나 새와 같은 구체적인 형상이 등장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원의 반복이라는 기존 조형 언어를 유지하면서 표현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는 것이다.

 

성지영 작가

성 작가는 “이번 개인전은 단순히 완성된 그림을 보여주는 자리가 아니라 ‘유무상화’라는 새로운 예술적 언어를 세상에 발표하는 자리”라며 “반복되는 원의 궤적을 통해 관객들이 존재하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깊은 조화를 느끼길 바란다”고 말했다.

 

상명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홍익대 대학원에서 미술을 공부한 그는 영국 런던 사치갤러리와 미국 뉴욕 첼시 등 국내외 그룹전에 참여했다. 2016∼2025년에는 대형 벽화 작업도 진행했다. 전시는 갤러리 라메르 1층에서 열리며 관람 시간은 오전 10시30분부터 오후 6시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