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 이민진의 1100쪽 신작…이번엔 ‘학원’으로 본 이민자의 삶

이민진 ‘아메리칸 학원’ 출간

어떤 소설은 쓰는 데 10년이 넘게 걸린다. 이민진의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은 집필을 시작한 지 11년 만에 출간됐고, ‘파친코’를 쓰는 데는 20년이 걸렸다. 신작 ‘아메리칸 학원’(현대문학)은 ‘파친코’ 이후 9년 만에 나왔다. 1992년부터 2007년까지 서울과 시드니, 미국 캘리포니아를 오가는 한 가족의 15년을 통해 이민과 경제 위기 속에서 흔들리는 한국계 이민자 가족의 초상을 그린다.

이민진 장편소설 ‘아메리칸 학원’(현대문학, 전 2권)

영어권 독자에게는 낯설 한국어 ‘학원(Hagwon)’을 제목으로 내건 점부터 눈길을 끈다. 1992년, 호주에서 서울 개포동으로 돌아온 존(요한)과 헬렌(혜진) 고 부부는 미국 뉴저지에서 태어나 시드니에서 자란 십 대 자녀 셋 보, DH, 미도를 한국 학교에 적응시켜야 한다. 칠판 앞에서 수학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해 교사에게 손바닥을 맞은 중학생 막내딸 미도는 같은 반 친구 윤의 소개로 대치동에서 입소문 난 학원, 이글 아카데미에 다니기 시작한다. 엄격한 학교와 달리 자기 속도에 맞춰 공부할 수 있는 학원은 내성적이고 자기표현에 서툰 미도에게 피난처가 된다. 

 

가족의 삶은 순탄하지 않다. 존은 직장 상사이자 오랜 친구인 신에게 배신당하고 신의 상간녀가 꾸민 간계에 휘말려 대기업 일자리를 잃는다. 1997년 외환위기까지 겹쳐 가족은 다시 삶의 터전을 옮긴다. 서울대를 졸업한 회계 전문가 존과 이화여대 출신 헬렌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렌지카운티에 정착하지만, 한국에서 쌓은 학력과 경력은 새 사회에서 예전의 중산층 지위를 보장하지 못한다.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존은 ‘쉬림프캐슬’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이름의 식당의 기름 냄새 밴 주방에서 육체노동을 하고, 헬렌은 건강이 망가지는 것도 외면하며 판매사원으로 일한다. 

 

이때 학원은 교육기관 이상의 공간이다. 미국의 한인 학원은 자녀의 입시를 준비하는 곳인 동시에 이민자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터다. 아이를 맡겨야 일할 수 있는 부모에게는 돌봄의 공간이고, 비슷한 고민과 기대를 지닌 사람들이 만나는 공동체이기도 하다. 학업 성취를 향한 열망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 자녀를 위한 부모의 희생과 그에 따르는 부담이 한데 얽힌 곳이다. 학원을 입시 경쟁을 부추기고 학부모의 부담을 키우는 ‘기형적 열풍’의 상징으로만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다.

이민진. ⓒ Hae Ran of Channel Yes

이 소설의 미덕은 고 씨 가족과 인척, 친구 등 수많은 인물의 삶을 넓은 시공간에 걸쳐 그려낸다는 데 있다. 외환위기 같은 역사적 사건부터 일자리와 주거지를 둘러싼 일상의 고단함까지, 시대의 변화와 개인의 운명이 맞물린다. 한인 교회와 학원에서 벌어지는 관계와 경쟁도 인물들의 삶에 입체감을 더한다. 여러 인물이 여러 도시를 오랜 시간에 걸쳐 오가는 만큼 일부 감정 변화와 사건의 전환이 다소 급하게 처리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인물 각자의 굴곡을 한 가족의 긴 역사 속에 엮어내는 작가의 솜씨는 일품이다. 두 권을 합쳐 1100쪽이 넘는 이 방대한 가족 서사에서 한 가족의 선택과 희생을 따라가다 보면 개인의 삶을 좌우하는 것은 의지만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가는 시대와 사회라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아메리칸 학원’은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과 ‘파친코’에 이은 이민진의 디아스포라 4부작 중 세 번째 작품이다. 다음 작품 ‘마셜 플랜’은 파독 광부와 간호사를 비롯한 유럽의 한국 디아스포라의 이야기를 다룰 예정이다. 현재 뉴욕에 거주하는 이 작가는 회고록 ‘네임 레커그니션(Name Recognition)’도 집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