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지도의 정치외교학

국가권력 투영된 지도 왜곡 맞서
유엔이 사용 권고한 ‘이퀄 어스’
동해 병기했지만 독도는 안보여
정부는 표기 누락 적극 대응해야

노원구에 있는 서울시립과학관에서 비행기 이동경로에 관한 전시를 본 적이 있다. 지구본 위의 최단 직선 경로(대권항로)가 우리가 흔히 보는 평면 지도에서는 왜 곡선 형태로 나타나는지를 설명하고 있었다. 구체인 지구를 2차원 지도로 전환할 때는 당연히 왜곡이 생기는데 그동안 ‘항공노선=곡선’이라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지도에는 이 같은 왜곡과 착시가 적지 않다. 나침반을 이용한 해상 항해 목적으로 설계된 메르카토르 도법은 고위도로 갈수록 면적이 크게 왜곡된다. 비록 특정 국가를 크게 보이게 하려는 의도는 없었다지만, 유럽이나 북미, 러시아는 실제보다 크게 그리고 적도 주변 지역은 상대적으로 작게 나타낸다. 그린란드 면적의 14배인 아프리카 대륙이 지도상에서는 비슷한 크기로 보이는 이유다.

유태영 도쿄 특파원

이에 더해 국경이나 지명 표기에는 특정 국가·세력의 입김이 노골적으로 작용한다. 당장 세계 각국의 지도에 독도와 동해가 어떻게 표시되고 있는지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영국 지도학자 존 브라이언 헐리는 지도 속 ‘침묵’과 ‘강조점’은 사회적 권력관계와 연결될 수 있다며 이를 통해 누가, 누구를 위해 해당 지도를 제작했는지 알 수 있다고 했다.



지난달 초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지도 바로잡기(Correct the Map) 결의안’은 그런 면에서 흥미로웠다. 결의안은 학교, 공공기관, 국제기구 등에서 각 대륙과 국가의 상대적 면적을 실제에 가깝게 표현한 ‘이퀄 어스(Equal Earth·평등한 지구)’ 지도 등을 쓰도록 권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국, 일본 등 164개국이 찬성했고 우크라이나 등 6개국이 기권했다. 반대는 미국이 유일했다. 그동안 시각적으로 작게 인식돼 온 아프리카 국가들은 지도 왜곡을 바로잡는 ‘정의’가 이뤄졌다며 환호했다. 반면 미국은 ‘급진적 이념 프로젝트’라고 깎아내렸다.

이퀄 어스 지도는 지구를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궁금해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다. 과연 각 대륙의 상대적 크기를 더 정확히 나타낸다는 점에서 공정해 보였다. 하지만 지명 표기 등에서는 여전히 정치학이 작동하고 있었다. 이 지도를 만든 톰 패터슨은 “유엔, 유럽연합 또는 미국의 정책을 반드시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미국 중앙정보국(CIA) 세계 정치 지도를 지명 표기의 주요 참고자료로 활용했다고 설명했다. 국가·수도명은 대부분 미국 정부 지도 표기를 따랐다. 크름반도에는 우크라이나 색깔도 러시아 색깔도 아닌 회색으로 칠하고 ‘러시아 행정권, 우크라이나 주권’이라는 설명을 달았다.

몇몇 지역에 대해서는 판단을 보류한 것으로 보였다. 독도의 존재는 한글판 외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다. 헐리가 말한 ‘침묵’이 떠오르는 장면이다. 한글판에 ‘동해’라고 적힌 바다는 영어·일본어·중국어판 등에 ‘일본해’(Sea of Japan·日本海)라고 표기돼 있었다.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영유권 분쟁 지역인 남쿠릴열도 4개 섬(일본명 북방영토)은 애초 러시아와 동일한 노란색 계열로 칠해 놓고 ‘러시아 행정권, 일본 영유권’이라는 설명을 달아놨었다. 일본 정부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기하라 미노루 관방장관은 “일본 정부 입장과 반대되는 표기가 있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며 “웹사이트 운영자에게 재외 공관을 통해 지도 표기를 수정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설명했다. 다음날 이투루프(일본명 에토로후) 등 남쿠릴열도 4개 섬은 일본 영토와 비슷한 회색으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독도와 동해는 어떨까. 18일 오전 현재 독도는 한글판에서도 사라져 있다. 동해만 영어·일본어·중국어판 등에서 일본해 표기와 병기하는 것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제작자 측은 “절충안으로서 한·일 지도에서 독도 표시를 모두 없앴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역사적·지리적·국제법적으로 명백한 대한민국 고유의 영토인 독도가 세계인이 내려받아 사용하는 ‘공정한 지도’에서 사라진 데 대해 우리 정부는 어떻게 대응하려는 걸까. 일본어판에도 다케시마(竹島·독도의 일본식 표기)가 없으니 괜찮다고 넘어가기엔, 애초 한글판에 있었던 독도의 존재가 아예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이 뼈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