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책 스캔해 AI 모델 학습… 저작권법 위반 적용은 불분명 [탐사기획-학습데이터 부적절 수집]
기사입력 2026-10-18 18:14:45 기사수정 2026-10-18 18:14:44
저작자 이익 해치지 않는 선 허락 없이도 ‘공정이용’ 가능 “영리추구 AI기업이 해당되나” 출판사·작가 권리 위축 우려
인공지능(AI) 기업의 ‘헌책 사냥’이 저작권의 경계를 시험하고 있다. 합법적으로 구매한 종이책을 스캔해 AI 모델 학습에 이용하는 행위를 기존 저작권법으로 규율할 수 있을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AI 학습 목적으로 종이책 이용을 허용할 경우 출판사와 작가의 권리가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도 만만치 않다.
AI 기업이 기댈 수 있는 법적 근거는 ‘공정이용’ 개념이다. 저작권법 제35조의5는 저작물의 통상적인 이용 범위 내에서 저작자의 정당한 이익을 부당하게 해치지 않는다면, 저작권자의 허락 없이도 저작물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한 포괄 조항이다.
국내에서 공정이용 조항의 판단 기준이 구체적으로 제시된 대법원의 첫 판결은 2024년 ‘대학 입학 수학능력시험 기출문제 게시 사건’이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문학 작품 등이 실린 기출문제를 시험이 끝난 뒤에도 홈페이지에 올려둔 것을 두고, 대법원은 공익적·비영리적 측면을 감안해도 타인의 저작물을 인터넷에 무단게재하는 행위는 공정이용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다만 이 사건의 쟁점은 저작물을 원본 그대로 게시한 행위였다. AI 학습을 위한 대규모 저작물 이용의 적법성을 직접 판단한 판례는 아니다.
학계에서는 신중론과 비판론이 나온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저작권위원회가 구성한 ‘AI-저작권 제도 개선 워킹그룹 특별분과’에 참여한 김인철 상명대 교수(지적재산권 전공)는 “아직 국내에선 판례가 충분치 않아 각자의 판단이 다를 것”이라며 판단을 유보했다. 반면 이광석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디지털문화정책 전공)는 공정이용이 “비상업적인 이용에 국한해서 연구·교육 등 공익적 목적에 따라 예외를 두는 것”이라며, 영리를 추구하는 AI 기업의 학습은 공정이용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눈여겨볼 사례는 미국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연방북부지법은 지난해 6월 작가들이 앤트로픽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합법적으로 취득한 책을 스캔해 AI 모델 ‘클로드’ 학습에 이용한 행위를 공정이용으로 인정했다. 다만 불법으로 다운로드받은 전자책에 대해선 공정이용으로 보지 않았다. 앤트로픽은 불법 복제본 이용과 관련해 작가들에게 15억달러(약 2조2000억원)를 지급하기로 합의했다.
합의로 소송이 종결되면서, AI 학습의 공정이용 여부에 대한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단은 알 수 없게 됐다. 임상혁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는 “미 연방대법원의 판례가 나온다면 전 세계 사법부가 영향을 많이 받을 것”이라며 “미 연방대법원은 기본적으로 공정이용에 대해 기업에 유리하게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공정이용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도출되기 까지 AI 기업의 종이책 확보 경쟁은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이런 흐름이 이어지면 출판 생태계가 흔들릴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결국 소수의 빅테크가 방대한 저작물을 바탕으로 지식과 그로부터 창출되는 이익을 독점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대한출판문화협회 상무이사를 맡고 있는 김현종 더블북 대표는 “출판사와 저자에 대한 정당한 보상 없이 AI에 의한 종이책 학습이 계속되면 출판 업계에 큰 타격을 줄 것”이라고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