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왕설래] 시대착오적 과잉 의전

1218년, 칭기즈칸은 호라즘제국과 무역을 하기 위해 400여명의 대규모 사신 및 상단을 보냈다. 하지만 호라즘의 오트라르 성주는 이들을 스파이로 몰아 처형하고 재산을 빼앗았다. 칭기즈칸은 다시 3명의 특사를 보냈지만, 호라즘의 샤(국왕) 무함마드 2세는 이들마저 수염을 태우고 목을 베어 돌려보냈다. ‘외교 사신은 죽이지 않는다’는 당시 국제 의전을 철저히 무시한 것이다. 분노한 칭기즈칸은 이듬해 20만 대군으로 원정을 단행, 오랜 전쟁 끝에 호라즘제국을 멸망시켰다.

 

그리스어 ‘Protokollon’(책이나 문서의 맨 앞에 붙이는 표지)에서 유래한 ‘의전(Protocol)’은 국가나 조직, 개인 간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공식적 규범과 예우를 말한다. 고대와 중세 의전은 왕실이나 국가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성격이 더 강했다. 그래서 의전 갈등은 국가 간 자존심 싸움을 넘어 전쟁이나 무력 갈등으로 비화하기도 했다. 근대적 의전은 1815년 빈 회의를 통해 외교관 등급과 서열을 명문화하면서 기틀이 잡혔다.

 

하지만 균형을 잃은 문제적 의전은 여전하다. 호라즘 같은 ‘무시(결례) 의전’, 격이 맞지 않는 ‘불일치 의전’, 주변 사람에게 위화감을 주는 ‘과잉 의전’ 등이 대표적이다. 국내 정치권에서 과잉 의전은 여야 가리지 않는 오랜 구태였다. 황교안 전 총리는 관용차를 탄 채 KTX 서울역플랫폼 내부까지 직행한 뒤 탑승해 비판이 쏟아졌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도 지난 8월 경남 밀양 가뭄피해 현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수행원이나 현장 관계자가 이동이나 브리핑을 위해 과도하게 신체적 보조를 맞추거나 부축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 ‘인간 받침대’ 논란이 일었다.

 

최근 김민석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역 축제에서 가수 공연 도중 무대에 올라 인사말을 했다가 ‘과잉 의전’ 논란이 일자 사과했다. 김 대표는 지난 15일 전북 ‘순창장류축제’ 개막식 축하공연에서 가수 흰(HYNN)이 두 곡을 부른 뒤 사회자 요청에 따라 무대에 올라 관객에게 인사말을 건넸다가 빈축을 샀다. ‘격식은 갖추되 마음은 낮추는 것’이 의전의 핵심이다. 형식에 얽매여 본질과 존중을 잃으면 의전이 아니라 ‘권위주의’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