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월 1000만원 덫 청춘이 갇혔다 [심층기획-유인 '공짜 비행기'에 탄 청년]

<상> ‘고수익 유혹’의 끝은 파국이었다

‘쉬운 돈벌이’ 좇다 스캠조직원 전락… 평균 2221억 뜯어냈다

캄보디아 ‘스캠 범죄’ 사태 1년
2025부터 하루 한 명꼴 법정에
1인당 79명 울려… 징역 3.9년형
범정부 대책에도 여전히 성업

친구·선후배 등 지인 제안에 출국
비행기값 내주고 호화 숙소 약속
도착 즉시 여권 뺏기고 범행 가담

1년4개월간 1심 판결문 분석 결과
피고인 380명 중 83% 실형 선고
해외 검거 72%가 30대 이하 청년
지난해 캄보디아 사기범죄단체 조직에 유인된 한국인 대학생이 사망하고 정부가 각종 대책을 내놨지만, ‘성명불상의 총책’은 여전히 국경을 옮겨 다니며 막대한 범죄수익을 올리고 있다. 그들의 유인에 넘어간 청년들은 하루 한 명꼴로 법의 심판을 받는다. 말단 조직원이 검거돼도 범죄는 계속된다. 해외 사기범죄단체 사건 피고인·피해자 12명, 관련 사건 경험이 있는 판사·검사·변호사·경찰 13명 등 25명의 이야기를 들었다. 관련 사건 판결문 222건도 분석했다.

 

“중국에 오면 지금 하는 일보다 훨씬 더 많이 벌 수 있다. 일단 건너와 봐라.”

 

퀵서비스 배달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던 A씨는 어느 날 지인으로부터 권유를 받았다. B씨도 “라오스에서 환전 일을 도와주면 매월 1000만원은 우습게 벌 수 있다”는 제안에 친구와 함께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 표도, 현지 호텔 숙식도 모두 ‘공짜’였다. 혹시 불법적인 일은 아니냐고 여러 번 물었지만 그때마다 “안 걸린다”, “문제가 생겨도 집행유예로 풀려날 수 있는 대본을 준다”는 대답에 눈을 감았다.

생성형 AI 이미지

‘고수익’의 유혹에 걸린 청년들은 그렇게 해외 사기범죄단체의 조직원이 됐다. 범죄 대본을 읽으며 검사를 사칭했고, 여성인 척 피해자들에게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접근해 가상자산 투자를 유도했다. 이들은 수많은 피해자의 일상을 무너뜨린 대가로 결국 법정에 섰다.

 

지난해 8월 캄보디아 사기범죄단체 조직에 유인된 한국인 대학생이 사망했다.

 

범정부 관계부처 태스크포스(TF)는 같은 해 10월 각종 대책을 내놨다. 인천공항에는 ‘스캠 범죄 가담 주의’ 안내 간판이 세워졌고, 경찰은 공항에서 캄보디아로 출국하는 청년들을 대상으로 불심 검문을 실시했다. 그러나 사건이 세상의 관심에서 멀어지면서 이러한 조치들은 현재 중단됐다.

 

범정부 대책이 나온 지 1년이 지난 지금 해외 범죄단체의 ‘청년 유인 비즈니스’는 여전히 성업 중이다.

 

지난해 1월1일부터 올해 9월30일까지 경찰청 ‘스캠 피의자 해외 검거 현황’을 보면 전체 검거 인원은 2025년 516명에서 올해 9월 기준 642명으로 24.4%(126명) 증가했다. 이들이 노리는 타깃은 청년이다. 전체 1158명 가운데 30대 이하 청년이 71.6%(829명)를 차지했다. 여기에는 10대 청소년 2명도 포함됐다.

 

세계일보는 19일 판결문 검색 서비스 엘박스(LBox)를 통해 지난해 1월1일부터 올해 4월30일까지 1년4개월간 선고된 관련 사건 1심 판결문 214건을 수집해 분석했다. 전체 피고인 숫자는 380명이었다. 하루에 한 명꼴로 범죄조직의 유혹에 유인된 청년들이 법정에서 법의 심판을 받고 있는 셈이다. 이름만 다를 뿐 판결문 안에서 이들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지인에게서 받은 달콤한 제안을 덥석 물고, 현지에 도착하자마자 여권을 빼앗긴 채 범행에 가담했다. 이들이 콜센터 상담원 등 ‘말단’으로 가입한 각 범죄조직의 총책은 ‘성명불상’으로만 기재된 채 종적을 감췄다. 범죄단체에 가입한 피고인 380명의 판결문에선 조직의 유인에서부터 범행 가담, 실형 선고에 이르는 과정이 판박이처럼 반복됐다. 청년들을 해외 범죄단체로 이끈 건 ‘아는 사람’이었다. 피고인 중 친구나 동네 선후배 등 ‘지인의 제안’을 받고 가담한 비율이 32.6%(124명)였다.

◆‘무일푼 출국 패키지’는 미끼

 

‘총책·조직원의 제안’은 42.4%(161명)였는데, 여기에는 기존 조직원이 지인을 끌어들이거나 온라인 게임을 통해 친분을 쌓은 뒤 포섭한 경우가 다수 포함됐다. 피고인 대부분이 인적 관계를 타고 범죄에 연루된 셈이다. SNS 등의 ‘고수익 알바 광고’를 보고 직접 찾아간 경우는 13.9%(53명)였다.

 

조직이 던진 미끼는 ‘무일푼 출국 패키지’였다. 피고인의 91.1%(346명)가 범죄조직으로부터 항공권과 숙식을 사전에 약속받았다. 숙식을 제공받기로 한 피고인은 90.5%(344명), 항공권까지 공짜로 건네받아 출국한 피고인은 62.4%(237명)였다.

 

관리자 등 총책의 국적은 확인된 169명을 기준으로 중국인이 69.2%(117명), 중국 동포가 23.7%(40명)로 중국계가 92.9%를 차지했다. 총책이 한국인인 경우는 5.9%(10명), 한국인과 중국인이 공동 총책인 경우는 1.2%(2명)에 불과했다. 해외에 자본과 설비를 마련한 중국계 총책이 한국인 대상 사기 범행을 위해 한국 청년을 조직원으로 유인하는 구조다.

 

◆‘행동강령’ 따르며 조직 수족으로

 

청년들은 조직의 손과 발이 됐다.

 

피고인의 83.4%(317명)는 콜센터 상담원 등 말단 조직원이었다. 이들은 기본급 외에 사기 편취액의 10~20%를 성과급으로 정산받거나 가상화폐 등으로 수당을 챙기며 범행에 가담했다.

 

범행 수법은 치밀하게 분업화돼 있었다.

 

캄보디아 시아누크빌의 호텔 12층을 통째로 빌려 운영된 한 로맨스스캠 조직은 신규 조직원에게 1인당 휴대전화 7대를 지급해 단체대화방 바람잡이용 ‘화력지원 계정’과 여성 사칭 계정 4개 등을 동시에 돌리게 했다. 중국 다롄시 빌딩에 태극기와 검찰청 깃발, 압수물 박스, 법복까지 갖춘 ‘가짜 검사실’을 차려놓고 영상통화를 걸거나, 피해자가 어디로 전화를 걸든 조직원에게 연결되는 악성앱을 이용해 돈을 가로채기도 했다.

 

◆평균 10.2개월 가담, 징역 3.9년

 

피고인들의 평균 범행 가담 기간은 약 10.2개월로 1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기간 청년들이 가담한 조직이 끼친 피해 규모는 막대했다.

 

평균적으로 피고인 1명이 가담한 범죄에서 발생한 피해자는 79명(확인 가능한 피고인 271명 기준), 피해금은 2221억5121만원(확인 가능한 피고인 340명 기준)에 달했다. 한 사건에 여러 명이 연루된 공범 사건의 경우, 동일 피해라도 피고인마다 가담했다고 적시된 범죄 내용을 중복해서 반영해 산출했다. 피해는 단지 돈을 잃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관련 사건을 심리한 한 재판부는 “피해자 대다수가 사회초년생으로 재산 대부분을 잃고 막대한 빚을 지게 됐으며, 피해자 중 1명은 범죄조직의 압박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판결문을 통해 지적했다.

 

피해 규모가 크고 회복이 이뤄지지 않다 보니 피고인 대부분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피고인 중 실형 선고가 82.6%(314명), 징역형 집행유예 선고가 10.8%(41명)였다. 평균 형량은 실형 선고 기준 징역 3.9년이었다.

 

범죄조직이 건넨 ‘공짜 비행기 표’의 대가는 실형이었다. ‘고수익 유혹’의 끝은 파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