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판 치이카와 속 세이렌이 부르는 잔혹 동화 [퇴근길 시네마]

“오늘 하루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단한 일과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 우리가 사랑하는 영화를 경제라는 렌즈로 새롭게 전해드립니다. 딱딱한 숫자에서 벗어나 취준생·자영업자·임시직·프리랜서 등 지금 돈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와 함께할 준비 되셨나요?

 

 

글 중반부에는 ‘극장판 치이카와: 인어 섬의 비밀’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스포일러가 쓰이지 않은 부분까지 글을 읽으신 후 영화 보고 돌아오셔도 좋습니다.

 

극장판 치이카와 속 캐릭터 세이렌이 인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극장판 치이카와: 인어 섬의 비밀’ 예고편 갈무리.

“원래는 인어가 세 마리 있었어. 그런데 먹혀버렸어. 그래서 나도 잡아먹고 있는 거야. 코러스도 셋일 때 완벽했고, 꿈의 벌레도 훨씬 잘 잡혔거든(웃음).”

 

영화 ‘극장판 치이카와: 인어 섬의 비밀’(이하 극장판 치이카와)은 치이카와와 친구들이 고수익을 노리고 섬으로 ‘토벌(원정 사냥)’을 떠나며 시작됩니다.

 

사실 치이카와는 영화화되기 전부터 수많은 대중의 열광을 받아왔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날의 현실을 너무나 똑같이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죠. 주인공 치이카와와 친구들은 매일 아침 출근해 풀을 뽑거나 몬스터를 잡고 보수를 받습니다. 그래야 식당에서 밥 한 끼를 사 먹을 수 있으니까요. 청약에 당첨되지 않으면 동굴이나 길바닥에서 자야하고, 몸값을 올리려면 저녁 시간을 쪼개 ‘제초검정(자격증)’ 공부를 해야 합니다. 퇴근 후 한밤중에 시험공부를 하는 치이카와를 보고 있으면 왠지 남 일 같지 않아 가슴이 찡해집니다.

 

치이카와를 사랑해 온 관객이라면 이 소소한 동화 같은 이야기가 실은 우리가 견뎌내는 잔혹한 경제 현실이라는 걸 단번에 눈치 챌 수 있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일해야 하고, 약간의 임금 인상을 위해 스펙을 쌓아야 하며 내 집 마련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인 세상 말입니다.

 

‘극장판 치이카와: 인어 섬의 비밀’ 포스터. 대원미디어 제공.

이번 극장판 역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루 일을 마친 치이카와가 ‘가르마(하치와레)’와 소소하게 저녁을 먹던 중, ‘토끼(우사기)’가 대박 아르바이트 공고 하나를 들고 옵니다. ‘인어 섬’에 가서 간단한 토벌을 해주면 보수를 무려 100배나 준다는 겁니다. 치이카와는 섬으로 떠나는 배 안에서도 손에서 자격증 책을 놓지 못합니다. 그렇게 ‘인생 역전’을 꿈꾸며 떠난 길에서 이들은 섬에 숨겨진 기괴한 비밀과 마주합니다. 일확천금을 기대하며 해외 원정 알바를 떠났다가 범죄의 덫에 걸려드는 오늘날 청년들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순간입니다.

 

새롭게 등장한 강력한 캐릭터 ‘세이렌’과 ‘인어들’의 관계 역시 현실 자본주의의 그림자를 짙게 투영합니다. 세이렌이 노래를 시작하면 인어들이 화음을 얹으며 아름다운 멜로디가 울려 퍼집니다. 하지만 이들은 함께 음악을 즐기는 평등한 친구가 아닙니다. 세이렌은 목소리로 인어를 조종해 섬 주민들을 공격하고, 치이카와 일행을 구석으로 몰아넣습니다. 인어들은 세이렌의 명령에 따라 노동하고, 대신 세이렌의 막강한 힘을 등에 업은 채 섬 주민들로부터 공짜 식사를 제공받습니다. 세이렌과 인어의 관계는 친구나 가족보다는 ‘사용자와 노동자’의 관계에 가깝습니다.

 

이들의 관계는 세이렌의 불만에서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세이렌은 잡아먹힌 인어에 대해 어떠한 인간적인 애도나 슬픔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인어 한 마리가 사라지는 바람에 자신의 시그니처인 ‘노래 화음’에 흠집이 생겼고, 수확물인 ‘꿈의 벌레’ 생산성이 떨어졌다며 짜증을 낼 뿐입니다. 인어는 그저 세이렌의 수익성을 높여주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죠. 자본주의 사회 속 사용자와 노동자의 관계가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극장판 치이카와 속 섬 주민 ‘한잎’과 ‘두잎’의 모습. ‘극장판 치이카와: 인어 섬의 비밀’ 예고편 갈무리.

(※ 이후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섬 주민인 ‘한잎’이와 ‘두잎’이가 인어를 잡아먹게 되는 비극적인 과정에도 이 노동 구조가 고스란히 반영돼 있습니다. 세이렌과 인어들이 갑자기 섬에 나타나자 겁에 질린 주민들은 이들에게 음식을 가져다 바치기 시작합니다. 마침 세이렌이 기분이 좋아 부르는 노래 덕분에 섬의 작물들이 풍작을 이루자, 주민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합니다.

 

여기서 세이렌을 ‘자본가’, 주민들을 ‘노동자’로 치환해 볼 수 있습니다. 자본가가 제공하는 대가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생존이 걸린 노동자는 이를 군말 없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세이렌과 주민의 관계나 세이렌과 인어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다를 게 없습니다. 다만 인어들은 의식주라는 직접적인 대가를, 주민들은 ‘작물이 잘 자라는 환경’이라는 간접적인 대가를 얻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이렌이 배불리 먹고 유유자적 놀며 만든 큰 파도에 ‘한잎’이가 휩쓸려 죽음의 문턱에 서게 됩니다. 사고 직전, 한잎이는 세이렌을 처음 보고 두려워하는 친구(애인, 가족) ‘두잎’이에게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라며 활짝 웃는데 참 대비되는 결과입니다. 노동자들이 ‘우리 회사는 다른 곳과 달리 좋다’고 하다가 회사의 구조조정에 일자리를 잃는 모습, 사용자가 비용을 줄이려다 혹은 무심코 한 행동에 발생한 안전사고에 노동 환경이 위협받는 모습이 오버랩됩니다.

 

두잎이는 “인어를 먹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오래된 전설을 떠올리고 인어를 잡아 죽어가는 한잎이에게 먹입니다. 같은 노동자 계급끼리 희생시켜 한을 풀려는 비극입니다. 세이렌을 잡아먹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전설이 있었다면 달랐을까요? 하지만 압도적인 자본가인 세이렌을 상대로 감히 ‘잡아먹겠다’는 결심을 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했을 겁니다.

 

인어를 먹은 한잎이와 두잎이가 영생을 누리게 되는 방식 또한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이들의 몸속에는 ‘건전지’가 들어갑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영원히 살아남는다는 건, 따뜻한 감정을 가진 ‘인격체’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건전지를 꼈다 뺐다 할 수 있는 ‘소모품’으로 살아간다는 뜻이 아닐까요. 같은 노동자를 희생시켜 얻은 이득은 잠깐 달콤할지 몰라도, 결국 스스로를 도구로 전락시킬 뿐입니다.

극장판 치이카와 속 캐릭터 세이렌이 섬 주민을 잡아먹고 있다.  ‘극장판 치이카와: 인어 섬의 비밀’ 예고편 갈무리.

세이렌은 인어를 잡아먹은 범인을 찾겠다며 섬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기 시작합니다. 사건이 일단락된 후 한잎이와 두잎이가 섬을 떠나 아무도 없는 곳에서 새 삶을 시작하려 하지만, 세이렌은 지구 끝까지 이들을 쫓아갑니다. 자신의 수익성에 손해를 입힌 존재는 끝까지 응징하고야 마는 사용자의 집요함과 닮았습니다. 파업으로 피해가 발생했다며 노동자에게 막대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하고, 즉각 직장폐쇄를 단행하며 삶의 기반을 흔들어놓는 현실의 모습과 너무나 똑같습니다.

 

세이렌은 범인을 잡으면 “어두운 곳에서 영원한 삶을 살게 해주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습니다. 노동자에게 영원한 삶이란, 건전지로 움직이는 도구가 되어 어둠 속에 영원히 갇히는 형벌과 다름없습니다.

 

세이렌의 첫 대사를 다시 한번 곱씹어 봅니다. 세이렌은 인어들과 함께 ‘꿈의 벌레’를 수확한다고 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가 노동자라는 도구를 활용해 수확하는 ‘꿈’은 과연 누구의 꿈일까요. 더 나은 삶, 소박하고 평안한 내일을 꿈꾸는 노동자들의 바로 그 꿈이 아닐까요.

치이카와와 친구들이 세이렌에 맞서 섬을 지키기 위해 모여있다.  ‘극장판 치이카와: 인어 섬의 비밀’ 예고편 갈무리.

‘치이카와’는 오늘을 살아가는 청년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팍팍한 삶을 거울처럼 투명하게 비춰냅니다. 동화처럼 귀여운 캐릭터들이 건네는 묵직한 현실의 메시지는 그렇기에 더욱 깊은 공감과 쓸쓸한 위로를 전합니다. 영화를 보고 소모적인 정치적 논쟁이나 색깔론을 매기기보다는 지금을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따뜻하게 살피는 계기로 삼아보는 것은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