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 을지로의 한 식당에서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직원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이 포착됐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구내식당 식사부터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의 ‘소맥’ 회식까지, 권위를 내려놓은 총수들의 스킨십이 일상화되는 모양새다. 현직 직원과 행사 실무자, 전문가의 목소리를 통해 이러한 ‘식사 소통’에 담긴 속내를 짚어봤다.
◆권위 벗고 식당에 마주앉은 총수들
지난 21일 최 회장은 을지로의 바비큐 전문점에서 직원들과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야외 좌석에서 일행과 대화를 나눈 뒤 인근 제주 음식 전문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모습이 담긴 사진과 영상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알려졌다.
최 회장이 직원들과 대중음식점에서 식사하며 소통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9년 10월에도 을지로의 한식주점과 광화문 인근 식당에서 직원들과 ‘번개 행복토크’를 진행했다. 당시 사내 인트라넷을 통해 참가자를 모집한 최 회장은 테이블을 돌며 직원들의 질문에 답하고 대화를 나눴다. 그해 직원들과 100차례 이상 만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국내외 사업장에서 행복토크를 이어가며 현장 소통에 공을 들였다.
다른 대기업 총수들도 직원들과 격의없이 식사하는 자리를 마련해 왔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부회장 시절인 2019년 1월 경기 수원사업장에서 직원들과 구내식당 점심을 함께했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직원들의 사진 촬영 요청에도 응했다.
2022년 8월에는 서울 송파구 삼성SDS 잠실캠퍼스 구내식당을 찾았다. 직원들과 나란히 줄을 서서 황태곰탕을 배식받아 점심을 먹고 기념사진 촬영과 사인 요청에도 응했다.
정기선 HD현대 회장도 지난해 10월20일 회장 취임 첫날 경기 성남시 HD현대글로벌R&D센터 구내식당에서 직원들과 점심을 함께했다. 직접 국수를 받아 식사한 뒤 직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사진을 찍었다. HD현대는 당시 모습을 공식 SNS에 공개했다.
정 회장은 당시 임직원에게 보낸 사내 메일에서 “언제 어디서든 여러분과 만나 경청하고 소통하겠다”며 “새로운 생각을 주저 없이 말할 수 있고 서로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주고받을 수 있는 HD현대가 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해외에서도 비슷한 만남이 있었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는 올해 2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타클래라의 한국식 치킨집에서 엔비디아와 SK하이닉스 엔지니어 30여명과 식사했다. 황 CEO는 테이블을 돌며 인사를 건네고 직접 소주와 맥주를 섞어 술을 따라주기도 했다.
이들 식사 장면은 공개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다. 최 회장의 이번 을지로 회식은 SNS 게시물을 통해 알려진 반면, 정기선 HD현대 회장의 취임 첫날 식사 모습은 회사 공식 SNS를 통해 공개됐다.
김지원 단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비공식적으로 공개된 모습이 기업의 공식 홍보물보다 자연스럽고 친근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대중이 홍보·광고 사실을 드러내지 않는 마케팅에도 익숙한 만큼, 공개 경로 자체보다 기존에 알려진 총수의 이미지와 실제 모습이 일치하는지가 중요하다고 봤다.
김 부교수는 “친근함과 기업에 대한 신뢰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며 “평소의 경영 방식이나 직원 대우가 소탈한 이미지와 일치할 때 긍정적인 인상이 지속적인 신뢰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특별한 추억이지만…솔직한 대화는 한계
직원들은 총수와의 식사 자리를 어떻게 바라볼까.
삼성 계열사에 재직 중인 A(28)씨는 “평소 직접 만날 기회가 거의 없는 경영진과 식사하는 기억이 회사에 대한 애착을 높이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서도 “짧은 식사 자리에서 직원들이 업무상 고충을 진솔하게 털어놓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고 말했다.
대기업에서 인사팀장으로 근무하며 경영진과 직원 간 소통 행사를 직접 준비했던 조모(42)씨도 이러한 만남의 긍정적인 효과는 인정했다. 직원들이 총수에게 회사의 전략과 비전을 직접 듣고 자신의 업무를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다. 조씨는 “직원들이 자기 업무를 직접 설명할 수 있다는 것도 의미가 있다”며 “그냥 같이 식사하면서 사람으로서 조금 편하게 느끼는 부분에도 소통 효과가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다만 격식 없는 자리에서도 직원들이 자유롭게 발언하기는 어렵다고 짚었다. 조씨는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한 번은 걸러서 하게 될 수밖에 없다”며 “행사가 잘 끝났다는 것과 직원들이 솔직하게 이야기했다는 것은 다르다”고 설명했다.
조씨는 무엇보다 행사 이후의 과정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아무런 답 없이 끝나면 직원 입장에서는 그때 이야기한 건 어떻게 된 것인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며 “직접 만나 거리감을 줄이는 효과는 있지만, 조직문화 차원에서 효과가 있었다고 판단하려면 직원들이 체감할 수 있는 후속 조치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밥 한끼로 문화가 바뀌긴 힘들어
전문가들도 총수와 직원 간 비공식적인 만남이 소통의 계기가 될 수 있지만, 일회성 행사에 그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종민 경희대 미디어학과 교수는 이러한 만남을 중간 관리자를 거치지 않고 경영진이 직원과 직접 소통하는 ‘스킵레벨 미팅(Skip-level meeting)’의 일종으로 설명했다. 박 교수는 “비공식적인 스킵레벨 미팅은 내부적으로는 의견 수렴, 외부적으로는 소통 리더십 차원에서 활용된다”며 “대외적인 목적보다 내부 의견 수렴에 무게를 둘 때 실질적인 소통이 이뤄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스킵레벨 미팅은 일회성이 돼서는 안 된다”며 “정기적이고 문제 해결 중심으로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소통의 자리가 기업 경영에 당장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과도한 기대보다는 조직의 온도를 서서히 바꾸는 계기로 삼는 것이 좋다는 의견도 나온다.
최동원 이화여대 경영대학 교수는 “좋아하는 연예인과 밥 한 끼를 먹으면서 직접 소통할 기회를 얻는 것과 비슷할 수 있다”며 총수와의 식사가 직원 개인에게 특별한 경험으로 남을 수 있다고 평가했다.
다만 식사 자리에서 나온 모든 건의사항을 해결하는 것을 소통의 성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중요한 것은 각자의 입장을 확인하고 상대방 입장의 근거를 이해하려 노력하면서 입장 차이를 좁혀가는 과정”이라며 “식사 소통을 문제 해결의 돌파구가 아닌 다양한 소통 방식 중 하나로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