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함 대신 낡은 공간과 흐릿한 인물… 패션 사진의 관습을 깨다

수영복 차림의 여성 다섯 명이 낡은 공중목욕탕에 흩어져 있다. 벽의 타일은 벗겨졌고, 여성들은 카메라를 바라보는 대신 각기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린다. 화려한 의상과 모델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던 1970년대 패션 사진과는 전혀 다른 장면이다. 미국 사진가 데보라 터브빌(1932∼2013)이 1975년 패션지 ‘보그’에 발표한 ‘배스하우스’ 연작이다. 당시 독자들의 거센 항의를 받았지만, 패션 사진의 관습을 깨뜨린 대표작으로 남았다.

 

서울 중구 전시공간 피크닉에서 23일 개막하는 ‘데보라 터브빌: 분위기’는 이처럼 패션 사진을 예술적 표현의 영역으로 확장한 작가의 세계를 조명한다. 국내 첫 개인전으로, 빈티지 프린트와 콜라주 원본 등 오리지널 작품 102점과 새롭게 제작한 프린트 88점 등 약 200점을 선보인다.

 

‘애서 레비 공중목욕탕 - 배스하우스 연작’(1975). 피크닉 제공

터브빌은 헬무트 뉴튼, 기 부르댕과 함께 1970년대 패션 사진의 새로운 흐름을 이끈 작가로 꼽힌다. 패션 잡지 ‘하퍼스 바자’와 ‘마드모아젤’의 에디터로 일하다 30대 중반에 본격적으로 사진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옷이나 모델을 매혹적으로 보여주는 데 있지 않았다. 낡은 건물과 희미한 빛, 생각에 잠긴 여성들을 통해 인물의 내면과 공간에 쌓인 기억을 표현했다.

 

사진을 찢고 오려 붙이는 실험도 이어졌다. 1975년 제작한 ‘마키야주’는 흐릿한 사진과 손글씨, 파편적인 문장을 자유롭게 배치한 가상의 패션 잡지다. 1000부 한정으로 제작된 이 출판물은 오늘날 독립 잡지인 ‘진(zine)’의 선구적 작업으로 평가된다.

 

‘꼼 데 가르송 연작’(1980). 피크닉 제공

영화와 문학 역시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었다. 작가는 잉마르 베리만과 알랭 레네 등의 영화에서 영향을 받아 사진 한 장에도 앞뒤의 이야기가 존재하는 듯한 장면을 만들었다. 러시아 문학에 심취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여러 차례 방문했고, 사진집 ‘스튜디오 상트페테르부르크’(1997)에는 도스토옙스키와 푸시킨 등의 글을 직접 골라 실었다.

 

1981년 출간한 사진집 ‘보이지 않는 베르사유’에서는 화려한 궁전의 이면을 포착했다.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의 의뢰로 일반에 공개되지 않던 베르사유 궁전 내부를 촬영하면서 천으로 덮인 가구와 먼지 쌓인 방, 세월의 흔적이 남은 조각상에 주목했다. 부와 권력의 상징인 궁전을 쇠락과 시간의 흔적이 남은 공간으로 바라본 것이다.

 

‘만토바, 이탈리아 - 개와 늑대의 시간 연작’(1977). 피크닉 제공

후기에는 사진과 문학을 결합한 콜라주 작업에 몰두했다. 1990년대 제작한 ‘패스포트’는 자신이 집필한 미발표 소설을 바탕으로 사진과 텍스트를 결합한 130여 점의 콜라주로 구성됐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 같은 후기 콜라주 원본도 만날 수 있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관통하는 개념으로 ‘분위기(atmosphere)’를 꼽았다. 그는 “나에게 분위기란 장소를 뜻하지만, 어떤 존재를 뜻하기도 한다. 분위기는 손에 잡히지 않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한 무엇”이라고 말했다. 전시 제목 역시 여기에서 가져왔다.

 

터브빌의 작업은 2013년 사망 이후 한동안 주목받지 못하다가 2020년 미국 무스 컬렉션이 아카이브를 인수하면서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이번 전시도 무스 컬렉션과 협력해 마련됐다. 내년 2월28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