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는 낯선 괴물이나 잔혹한 살인마에게서만 비롯되지 않는다. 가족을 향한 의심, 성공에 대한 집착, 치열한 취업 경쟁도 때로는 섬뜩한 공포가 된다. 인간의 불안과 욕망을 파고드는 스릴러 영화들이 잇달아 극장가를 찾고 있다. 익숙한 일상을 뒤틀어 심리적 긴장감을 자아내는 작품부터 극한 상황에서의 생존 사투를 그린 영화까지 소재와 표현 방식도 다양하다.
23일 극장가에 따르면 최근 연상호 감독의 ‘실낙원’을 비롯해 ‘베러티’, ‘웨일폴: 고래에 먹힌 남자’, ‘클레이페이스’, ‘킬링타임’ 등 스릴러 작품들이 쏟아지고 있다. 다음 달에는 취업 경쟁을 소재로 한 ‘최종면접’도 관객을 만난다. 작품들은 심리 스릴러부터 신체 변형의 공포를 다룬 바디 호러까지 장르적 색채가 다르지만, 인간의 불안과 욕망을 극한 상황으로 밀어붙인다는 점에서 맞닿아 있다.
◆믿었던 가족이 낯설어진다… 의심과 불신의 심리 스릴러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 비롯된 불안을 파고드는 작품은 ‘실낙원’과 ‘베러티’다. 지난 21일 개봉한 연상호 감독의 ‘실낙원’은 9년 전 실종된 아들이 갑자기 돌아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어머니 소영(김현주)은 돌아온 아들 선우(배현성)를 마주하지만, 그에게는 인공지능(AI) 프로그램 ‘낙원의 아이들’ 속에서 10살 모습으로 남아 있는 아들이 있다. 기억 속 아들과 현실의 아들 사이에서 소영은 혼란에 빠진다.
‘부산행’, ‘지옥’ 등에서 극한 상황에 놓인 인간의 본성을 탐구해 온 연 감독은 이번에는 모성애와 AI 기술을 결합했다. 디지털 공간에 보존한 기억과 눈앞의 현실이 충돌하면서 가장 친밀한 가족 관계가 불안의 근원이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얼마나 알고 있으며, 무엇을 근거로 그를 믿을 수 있는지 묻는다.
22일 개봉한 ‘베러티’ 역시 가까운 사람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을 포착한다. 미국에서 1000만부 이상 팔린 콜린 후버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심리 스릴러다. 무명 작가 로웬(다코타 존슨)은 사고로 움직임과 말을 잃은 베스트셀러 작가 베러티(앤 해서웨이)의 미완성 소설을 대신 완성하기 위해 그의 집에 머문다. 그러던 중 숨겨진 자서전 원고를 발견하고 충격적인 비밀을 마주한다.
원고에 적힌 이야기는 어디까지 사실일까. 로웬은 베러티와 그의 남편(조시 하트넷)을 둘러싼 의혹에 휘말리고, 관객 역시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려워진다. 작품은 소설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기 어려운 심리적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고래 뱃속부터 폐병원까지… 탈출구 없는 공포
인물의 심리를 파고드는 작품들과 달리 ‘웨일폴: 고래에 먹힌 남자’와 ‘킬링타임’은 벗어나기 어려운 공간을 공포의 무대로 삼는다. 지난 14일 개봉한 ‘웨일폴: 고래에 먹힌 남자’는 실종된 아버지의 유해를 찾기 위해 바다에 뛰어든 다이버 제이(오스틴 에이브람스)가 거대한 향유고래에게 산 채로 삼켜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고래 뱃속에 갇힌 그에게 남은 산소는 단 60분 분량이다. 요동치는 장기와 위산, 줄어드는 공기 속에서 탈출 방법을 찾아야 한다.
다니엘 크라우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고래 내부를 실제 크기에 가깝게 구현한 세트 등을 통해 폐쇄 공간의 압박감을 극대화했다. 제한된 시간 안에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과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맞물린다.
‘킬링타임’은 인터넷 방송을 공포의 무대로 끌어들였다. 몰래카메라 콘텐츠를 제작하던 인터넷 방송 크루는 방송 도중 발생한 사망 사고로 활동을 중단한다. 이후 스트리머 연우(류혜영)는 주원(남윤수)의 제안으로 폐병원에서 새로운 콘텐츠를 촬영하다 정체불명의 존재에게 쫓긴다.
장준엽 감독이 연출한 작품은 관심과 조회수를 얻기 위해 위험한 상황을 연출하던 사람들이 실제 생존의 위협에 놓이는 과정을 그린다. 타인의 공포를 구경거리로 소비하던 이들이 공포의 당사자가 되는 역설이 이야기의 출발점이다.
신체 자체가 공포의 대상이 되는 영화도 있다. 지난 21일 개봉한 ‘클레이페이스’는 범죄조직의 습격으로 얼굴과 명성을 잃은 할리우드 배우 맷 헤이건(톰 리스 해리스)의 이야기다. 그는 원래의 얼굴을 되찾기 위해 위험한 실험에 나서지만, 예상치 못한 부작용으로 신체가 기괴하게 변형되며 괴물로 변해간다.
DC 코믹스 캐릭터를 바탕으로 했지만 일반적인 슈퍼히어로 영화와는 거리가 멀다. 제임스 왓킨스 감독이 연출하고 마이크 플래너건이 각본을 맡은 작품은 신체가 일그러지고 무너지는 모습을 통해 외모와 성공에 대한 집착, 정체성을 잃는 두려움을 드러낸다.
◆5000대 1 경쟁률 뚫었더니… 동료를 떨어뜨려야 합격
다음 달 4일 개봉하는 ‘최종면접’은 취업 경쟁이라는 익숙한 현실을 밀실 스릴러로 바꾼다. 글로벌 기업의 채용 과정에서 5000대 1의 경쟁률을 뚫은 지원자 6명은 최종면접장에서 뜻밖의 과제를 받는다. 제한시간 2시간 안에 서로 토론하고 투표해 단 한 명의 합격자를 직접 선정하라는 것이다.
한 달간 함께 준비하며 동료가 된 지원자들은 순식간에 경쟁자로 바뀐다. 여기에 각자의 비밀이 적힌 의문의 봉투까지 등장하면서 면접장은 폭로와 의심이 뒤엉킨 공간이 된다. 조이현, 김재원, 신승호, 강유석, 곽동연, 배강희가 여섯 지원자를 연기한다. 김정훈 감독은 “요즘은 단 몇 초 만에 타인을 판단하는 시대이고, 면접은 그런 태도가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자리”라며 맥락이 제거된 진실이 한 사람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보여주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지원자들은 면접실에서 나갈 자유가 있지만 문을 나서는 순간 합격 기회를 포기해야 한다. 취업이라는 절박한 목표가 동료를 경쟁자로 만들고, 서로의 약점을 공격하도록 몰아가는 구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