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안 그러겠다”더니…4년 뒤 같은 곳 연쇄방화 [사건 속으로]

“뭘 죽이려고 해, 겁주려고 했지.”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서 연쇄방화를 저지른 혐의로 구속된 70대 남성 A씨는 지난 22일 오후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서울 수서경찰서를 나서며 ‘사람을 죽이려 했느냐’는 취재진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그는 자신이 특허법인에 사기를 당했다고 주장하며 “이 나라에서 사기꾼들을 보호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 건물 2곳에 불을 지른 혐의를 받는 70대 남성 A씨가 지난 22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진행되는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 오른쪽은 20일 화재가 발생한 역삼동 신명빌딩. 뉴시스·김수연 기자

 

A씨는 지난 20일 강남구 역삼동의 두 건물에 잇따라 불을 질러 19명을 다치게 한 혐의를 받는다. 특허법인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변리사 1명은 복도에서 심정지 상태로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졌다. 경찰은 A씨가 과거 협박했던 직원을 범행 직전 찾았다는 진술을 확보하고 살인미수 혐의 적용까지 검토하고 있다.

 

◆ 7분 간격으로 두 건물 불…범행 후 식당·콜라텍으로

 

20일 오전 11시54분. 역삼동 신명빌딩 3층에서 불이 났다는 신고가 잇따라 119에 접수됐다. 현장을 목격했다는 김모(38)씨는 “불길이 유리창 밖으로 치솟아 위층으로 번졌다”고 말했다. 7분 뒤인 낮 12시1분. 직선거리로 약 200m 떨어진 한양빌딩 4층에서도 불이 났다. 이번에도 특허법인 사무실이었다.

 

두 건물에서는 거센 불길과 연기를 피해 탈출하는 사람들이 잇따랐다. 급히 대피하다 깨진 유리에 다친 사람들도 있었다. 한양빌딩 후문부터 큰길로 이어지는 바닥 곳곳에는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건물 내 카페도 화재에 따른 시설 점검과 복구를 위해 임시휴무에 들어갔다. 두 건물에서 발생한 화재로 모두 19명이 다쳤다.

지난 20일 화재로 휴점한 서울 강남구 역삼동 한양빌딩 내 스타벅스. 김수연 기자

 

경찰은 A씨를 용의자로 특정하고 추적에 나섰다. 그는 범행 당일 서울 강서구 주거지에서 인화물질로 추정되는 물건을 들고 나와 역삼동으로 이동한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은 A씨가 특허법인 사무실 출입구와 엘리베이터 앞에 인화물질을 뿌리고 불을 지른 것으로 보고 있다.

 

불을 지른 뒤 A씨는 현장을 떠났다. 그는 낮 12시54분 서울 동대문구의 한 식당에 들어가 순댓국과 소주를 주문한 것으로 파악됐다. A씨가 소주 한 병을 모두 마시고 떠났으며 라이터를 버리고 간 것으로 전해졌다.

 

이후 A씨는 오후 1시25분 인근 콜라텍을 찾았다. 폐쇄회로(CC)TV에는 A씨가 콜라텍 카운터 앞에 서 있는 모습 등이 담겼다. A씨는 오후 2시40분 콜라텍을 나선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추적 끝에 오후 4시16분 동묘앞역 인근에서 A씨를 붙잡았다.

 

경찰 조사 결과 A씨는 범행에 앞서 휴대전화를 해지하고 인화물질 등을 준비한 것으로 파악됐다. 지난달 24일에는 서울 강서구 자택 인근 마트에서 까나리액젓과 식초를 구매했다. 경찰은 A씨가 범행 전날인 19일 해당 용기의 내용물을 비우고 주유소에서 산 휘발유를 담은 정황을 확인했다. A씨는 체포 직후 범행 준비 기간을 묻는 취재진에게 “한 3일 됐다”고 답했지만, 용기 구매 시점은 그보다 훨씬 앞선다.

지난 20일 A씨가 화재 발생 전 인화 물질로 추정되는 물건을 들고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한 건물을 향해 이동하는 모습. 연합뉴스TV 제공

 

◆ “다시는 찾아가지 않겠다”…당시 판결문 보니

 

A씨가 두 특허법인을 찾아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2022년 12월29일 오전 11시20분에도 A씨는 같은 특허법인 사무실을 찾아가 직원의 얼굴과 상체에 휘발유를 뿌렸다. 이어 라이터로 불을 붙이는 듯한 동작을 취하고, 달아나는 직원을 뒤쫓으며 가위를 휘둘렀다.

 

20분 뒤에는 다른 특허법률사무소를 찾아가 직원에게 휘발유를 뿌리며 “사기치지 마라,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다. 직원이 도망가자 뒤쫓아 가며 책상과 바닥에도 휘발유를 뿌렸다.

 

당시 A씨는 자신이 개발한 운동기구의 특허 출원을 맡긴 업체들이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해 범행한 것으로 조사됐다. 범행에 앞서 휘발유 약 2ℓ를 구매해 500㎖짜리 꿀페트병 4개에 나눠 담는 등 미리 준비한 사실도 판결문에 담겼다.

 

이 사건으로 A씨는 특수협박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서울중앙지법은 2023년 4월14일 A씨에게 징역 2년6개월을 선고했다. 같은 해 8월 항소심에서도 형이 유지됐다.

 

당시 재판부는 “추가적인 피해를 야기할 수 있었던 매우 위험한 범행”이라면서도 “A씨가 ‘다시는 같은 행동을 하거나 피해자들을 찾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한 점 등을 유리한 정상으로 고려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4년 뒤 A씨는 같은 업체들을 다시 찾아갔고, 이번에는 실제로 불을 질렀다.

 

경찰은 A씨가 방화 직전 특허법인 직원에게 과거 자신이 협박했던 직원의 근무 위치를 물었다는 피해자 진술을 확보했다. 이에 따라 단순히 불을 질러 겁을 주려 했다는 A씨의 주장과 별개로, 특정인을 해치려는 의도가 있었는지 살펴보고 있다.

A씨가 지난 20일 오후 서울 강남구 수서경찰서로 압송되며 준비한 서류를 꺼내보이고 있다. 그는 22일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면서도 ‘특허법인이 무엇을 속였는지’ 묻는 취재진 질문에 같은 종이를 꺼내보였다. 뉴스1

◆ “이건 가짜 서류”…‘종이 등록증’에 집착

 

A씨는 2019년과 2020년 각각 ‘근력운동기구’와 ‘운동기구’ 디자인을 국내에 등록했다. 등록 업무는 이번에 불이 난 두 건물에 입주한 특허법인 측이 각각 대리했다.

 

문제는 A씨가 요구한 ‘종이 등록증’이었다. A씨는 해외 상표 등록 과정에서 실물 등록증을 받지 못한 것을 문제 삼은 것으로 알려졌다. 특허법인 측은 해당 국가의 등록증이 온라인으로 발급된다고 안내했지만, A씨는 서류가 가짜라며 사기를 당했다고 주장했다.

 

다만 A씨 명의의 디자인 등록은 실제 이뤄진 것으로 확인됐다. 특허청 등록디자인공보에는 A씨가 디자인의 창작자이자 권리자로 기재돼 있었고, 미국과 브라질 등 해외에서도 등록 사실이 확인됐다. 특허법인들은 등록 절차를 대신 수행한 대리인이었다.

 

A씨는 출소 후에도 특허법인 측을 사기 혐의로 고소했으나 경찰은 혐의가 없다고 판단해 불송치 결정을 내렸다.

 

지난 20일 경찰서로 압송될 당시에도 A씨는 특허법인이 보낸 문자메시지 출력물을 펼쳐 보이며 “이건 가짜”라는 취지로 주장했다. 이틀 뒤 영장실질심사를 받으러 가면서도 서류를 내보이며 취재진에게 촬영을 요구했다.

 

경찰은 A씨가 자택에 종이 등록증을 걸어두는 등 관련 문제에 강한 집착을 보인 정황을 토대로 정신질환 병력 유무를 확인하기 위해 의무기록을 확보하고 있다.

 

◆ “겁주려고” 반복된 위협…출소 후 관리 공백은

 

A씨는 체포 직후 경찰 조사에서 범행을 대체로 인정하면서도 살해 의도는 부인했다. 특허법인 측의 사기를 세상에 알리고 겁을 주려 했다는 취지였다. 21일 진행된 2차 조사에서는 진술을 거부했다.

 

경찰은 A씨가 범행 당일 주거지 계약 종료를 통보하고 범행 도구를 버린 점 등을 근거로 도주 및 증거인멸 우려가 있다고 판단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그는 영장심사에서도 “미안한데, 그래도 내가 피해를 입었다”는 취지로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서울중앙지법은 22일 “도망할 염려가 있다”며 영장을 발부했다.

A씨가 지난 22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경찰은 23일 A씨에 대한 3차 조사를 진행하고, 향후 프로파일러를 투입해 범행 동기 등을 조사할 방침이다.

 

전문가들은 형사처벌 이후에도 범행의 원인이 된 갈등과 적대감이 해소되지 않을 경우 재범 위험이 남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과거 위협했던 동일한 대상을 다시 겨냥한 이번 사건은 교정·교화와 출소 후 위험 관리의 중요성을 보여준다는 분석이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방화 범죄는 범행 동기에 따라 정신건강 문제나 충동조절의 어려움 등이 위험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어 처벌뿐 아니라 개인별 위험성 평가와 심리·정서적 개입이 중요하다”며 “보호관찰 등 사후관리 강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