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철강의 땅에 풍력산업 뿌리… 23조 공급망 일궜다 [심층기획-韓 해상풍력 ‘트릴레마’]

<하> 바스크가 간 다른 길

‘제조 거점이자 물류허브’ 빌바오항
조선·철강 제조업 쇠락에 새길 찾기
유럽시장 선점·선도기업 견인 주효
해상풍력단지 없이 150개기업 성장

韓 ‘특화 기술로 틈새 공략’ 벤치마킹
바스크 정부, 정책 결합 신산업 구축
韓, 공공투자·실증 기반 확충 필요
가격 외 품질·기술 신뢰로 승부해야
“크기가 매우 큰 풍력 부품은 내륙에서 운송하기 어려워 항만에서 직접 생산합니다.”


지난 2일 스페인 북부에 위치한 바스크주(州) 빌바오항 현장. 욘 아나사가스티 빌바오항만청 사업개발·복합운송 총괄은 “이 지역은 약 25년 전만 해도 바다였다”며 이같이 설명했다.

지난 2일 스페인 바스크주 빌바오항에 타워, 블레이드(날개) 등 풍력발전 기자재들이 적재돼 있다. 빌바오항은 바스크 풍력 공급망 내에서 대형 풍력 부품을 만드는 ‘제조 거점’이자 유럽 대형 터빈 제조사의 부품을 각지로 내보내는 ‘물류 허브’ 역할을 하고 있다.

바다를 메운 땅에는 해상풍력 하부구조물 제조사 아이세아윈드(Haizea Wind) 공장이 들어서 있었다. 아이세아윈드는 유럽 내 최대 규모 해상풍력 하부구조물 제조업체 중 한 곳이다. 공장 옆 야적장에는 직경 8m, 길이 80m에 이르는 하부구조물 여럿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무게가 1500t인 이들 하부구조물은 모두 10∼15㎿(메가와트)급 대형 해상풍력 발전기에 쓰인다.

빌바오항은 바스크 풍력 공급망의 ‘출구’다.



아이세아윈드 공장처럼 대형 부품을 부두 옆에서 바로 만드는 ‘제조 거점’이자, 유럽 대형 터빈 제조업체인 지멘스가메사·베스타스·노르덱스악시오나가 부품을 쌓아두고 각지로 보내는 ‘물류 허브’다.

1991년 150㏊였던 항만 부지는 간척 등으로 지난해 430㏊까지 늘었다.

공공 10억유로(약 1조5000억원), 민간 25억유로(3조7000억원)가 투입됐다. 현재 부지의 38%가 풍력 용도다. 아나사가스티 총괄은 “풍력산업에 부지를 내주는 건 단순히 항만 차원의 결정이 아니다”라며 “바스크 전체의 발전을 고려한 비전”이라고 했다.

바스크는 주 관할에 해상풍력 단지 하나 없이 기업 150여곳, 약 157억유로(23조원) 매출(바스크무역투자청 기준)에 달하는 풍력 공급망을 일궜다. 일찍 뛰어든 선점 효과, 유럽에서 끌어온 물량, 선도기업의 견인이 맞물렸다.

◆러스트벨트에서 풍력 공급망으로

바스크 일대는 원래 조선과 철강의 땅이었다.

과거 빌바오 대표 조선소 에우스칼두나는 1986년 스페인의 유럽경제공동체(EEC) 가입을 위한 구조조정 여파로 1988년 문을 닫았다. 바스크무역투자청은 서면에서 “기존 금속가공·공작기계·단조·조선·전기설비·엔지니어링 기반이 풍력으로 방향을 전환하면서 산업이 생겨났다”고 밝혔다.

45년 된 바스크의 인양장비 기업 슬링신트(Slingsintt)가 제작한 리프팅 빔(인양용 보) 제품이다. 풍력 터빈 내 대형 핵심 부품을 크레인으로 들어 올리고 운반·조립할 때 하중을 분산시키고 수평을 맞추는 기능을 한다.

45년 된 인양장비 기업 슬링신트(Slingsintt)는 그런 사례 중 하나다.

이 기업은 크레인과 풍력 부품을 잇는 장비를 만든다. 블레이드(날개)나 나셀(발전기실)을 매달아 들어 올리는 리프팅 빔(인양용 보), 슬링(인양용 줄), 섀클(연결고리) 같은 것이다. 슬링신트의 출발은 항만과 금속 산업의 인양장비 검사였다. 호세 파라 슬링신트 국내영업이사는 “2005년 악시오나윈드파워가 블레이드 설치 솔루션 개발을 요청했고, 그게 풍력산업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계기가 됐다”며 “기존 인양 지식을 성장하는 새 시장에 적용했다”고 말했다. 1969년 설립된 산업용 유압기업 글루알(Glual)은 1992년 풍력시장에 진출했다.

알라스네 사발라에타 글루알그룹 대표는 “다양한 산업에서 혁신하는 과정에서 당시 풍력발전기의 유압 시스템을 설계하게 됐다”고 했다. 글루알의 주력 제품은 피치 실린더다. 풍속에 따라 블레이드 각도를 조절해 발전 효율을 높이는 부품이다. 글루알은 지난 35년간 전 세계 풍력발전기에 피치 실린더 약 150만개를 공급했다. 현재 이 기업 매출의 약 35%가 풍력에서 나온다.

바스크의 산업용 유압기업 글루알(Glual) 공장에서 풍력 터빈에 들어가는 유압 실린더 부품을 도장한 뒤 건조 라인에 매달아 놓은 모습. 글루알그룹 제공

이런 전환이 가능했던 건 무엇보다 시장에 먼저 뛰어든 덕이다. 안데르 곤살레스 바스크에너지클러스터 국제협력총괄은 “스페인은 덴마크와 함께 1980년대 후반부터 일찍 풍력산업을 시작했다”며 “1990년대 대규모 설치가 시작됐는데 제조기업이 충분하지 않았다”고 했다. 물량은 바스크 밖에서 나왔다. 바스크의 풍력 설비는 육상 143㎿가 전부이고 해상풍력 단지는 없다. 다만 스페인 전체로 보면 지난해 말 기준 32.9GW(기가와트)로 독일에 이어 유럽 3위다. 한국은 2.4GW로 스페인의 14분의 1 수준이다. 알라나 롤린스 바스크에너지청(EVE) 에너지계획·규제 담당은 “지멘스가메사 같은 기업은 스페인만이 아니라 유럽 전체 시장을 대상으로 사업한다”고 했다. 지멘스가메사 본사는 바스크 비스카야에 있다. 바스크 기업 가메사가 2017년 독일 지멘스의 풍력 부문과 합병해 지멘스가메사가 됐다.

공급망 성장에 선도기업 역할도 컸다. 바스크 빌바오에 본사를 둔 이베르드롤라는 풍력 설비 23.6GW(2025년)를 운영하는 세계적 풍력 발전사다. 곤살레스 총괄은 “이베르드롤라와 가메사가 공작기계·산업용 기계를 만들던 소규모 기업들을 풍력으로 전환하도록 설득했다”고 했다. 베고냐 디아스 이베르드롤라 해외사업총괄도 “이베르드롤라는 가능한 한 지역 공급망을 활용하려 했다”고 말했다.

◆옮길 수 없는 것, 배울 것

보급·가격·공급망의 트릴레마(3중 딜레마)에 놓인 한국 해상풍력에 바스크는 하나의 참고서다.

다만 공급망 해법을 그대로 옮기기는 어렵다. 출발선부터 다르기 때문이다. 슬링신트의 파라 이사는 “40년 전에는 모든 것이 새로웠지만 지금은 업계에 경험이 축적돼 있다”며 “새로 진입하는 기업은 격차를 빠르게 따라잡아야 한다”고 했다.

그래도 시사점은 있다. 먼저 정부 역할이다. 바스크무역투자청은 계획 수립, 위험을 나누는 공공투자, 실증 기반시설, 연구개발(R&D), 공급망 조정 등 정책이 결합해 “풍력이라는, 없던 산업을 만들었다”고 했다.

다만 정부가 의무 조건을 제시해 억지로 만든 공급망은 오래가지 못한다고 조언했다.

바스크무역투자청은 “대형 제조사가 특정 입찰을 위해 들어와 그 물량만 생산하고 비용만 높인 뒤 결국 문을 닫는다”며 현지 기업이 글로벌 제조사의 공급망에 들어갈 만큼 경쟁력을 갖춰야 산업을 남길 수 있다고 했다. 한국도 입찰로 공급망을 키우려 한다. 해상풍력 입찰에서 공급망 기여도에 14점을 준다. 바스크의 지적대로라면 배점용이 아니라 입찰 밖에서도 살아남을 공급망이어야 오래간다. 또 하나 참고할 만한 건, 경쟁력을 결정짓는 게 ‘가격’만은 아니란 것이다. 바스크는 품질과 틈새시장에서 공급망 경쟁력을 확보하고자 했다. 나고레 보니야 바스크무역투자청장은 “비용만으로 경쟁했다면 (바스크가) 지금 같은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글루알은 서면 답변에서 “초기 구매가격보다 제품 수명 전체의 가치로 경쟁하고 있다”고 했다. 사발라에타 대표는 “바스크 기업은 매우 전문적이고 특화된 기술을 가진 틈새시장 전문 기업”이라고 말했다. 슬링신트의 파라 이사도 “우리의 강점은 무엇보다 신뢰성”이라며 “초기보다 자격을 갖춘 공급업체가 늘었지만 모두 업계가 요구하는 품질 기준을 만족시키는 건 아니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