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되려는 돼지, 짐승 되려는 인간… ‘구제’ 향한 몸부림

K애니 ‘구제역에서 살아 돌아온 돼지’

살처분 생존 돼지 ‘H’
가혹행위 탈영 군인
지옥 탈출 위한 선택

1인 30역·3년의 촬영
故 허범욱 감독 집념

구제역에 따른 살처분에서 생존한 돼지 ‘H’. 가혹 행위에 시달리다 사고를 치고 탈영한 최정석 일병. 돼지는 살아남기 위해 인간이 되려 하고, 정석은 폭력과 괴롭힘에서 벗어나려 짐승이 된다. 지난 21일 개봉한 애니메이션 영화 ‘구제역에서 살아 돌아온 돼지’(이하 ‘구살돼지’)는 허범욱 감독의 도발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러나 허 감독은 자신의 두 번째 장편 애니메이션인 이 영화가 극장에서 관객을 만나는 모습을 보지 못한 채 지난 7월 사고로 43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영화의 주역인 모션캡처 배우 한우진과 캐릭터 디자이너 이한수의 목소리를 통해 영화의 독특한 설정과 이를 완성하기까지의 과정을 돌아본다.

◆30개 캐릭터, 한 명의 배우



배우 한우진은 ‘구살돼지’에서 주인공 돼지 H와 정석은 물론 대사 없는 엑스트라까지 30여 개 배역을 혼자 연기했다. 그는 세계일보와 인터뷰에서 “허 감독은 작은 배역 하나도 영화의 세계관 안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러한 작법을 택했다”고 전했다.

애니메이션 영화 ‘구제역에서 살아 돌아온 돼지’ 스틸컷. 인디스토리 제공

모션캡처는 배우의 몸에 부착한 센서 등으로 움직임을 기록해 디지털 캐릭터에 입히는 기술로, 영화 ‘아바타’ 등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구살돼지’는 제작 여건상 얼굴 표정과 몸의 움직임을 따로 캡처해야 했다. 한우진은 “촬영은 당초 5개월로 계획됐지만 실제로는 3년이 걸렸다”고 설명했다.

그는 “여러 캐릭터의 감정을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야 했던 나를 위해 허 감독은 감정선이 정교하게 계산된 촬영 계획표를 준비했다”며 “콘티가 그 자체로 완벽한 디렉션이었다”고 돌아봤다.

작업 중 허 감독은 이따금 “프랑스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에서 영화를 선보이고 싶다”는 바람을 이야기했다. 한우진은 “처음에는 지친 제작진을 북돋우는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작품은 실제 2024년 안시 미드나잇 스페셜 부문에 초청받았다. 그곳에서 영화를 처음 본 한우진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허 감독의 첫 장편 애니메이션 ‘창백한 얼굴들’(2015)과 ‘구살돼지’ 사이에는 약 10년의 간격이 있다. ‘구살돼지’ 작업은 제작비 문제로 중단되기도 했다. 한우진은 “허 감독과 프로듀서의 흔들림 없는 집념과 용기가 없었다면, 한 명의 배우가 전 배역을 연기해 완성한 이 전례 없는 장편 애니메이션은 결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라며 “그는 한국 영화계에서 애니메이션과 실사 영화의 경계를 과감히 허문 혁신가였다”고 했다.

돼지 ‘H’ 초기 디자인. 이한수 디자이너 제공

◆“사람이나 돼지나 다를 바 없는데”

캐릭터 디자인부터 배경, 스토리보드, 포스터까지 작업한 캐릭터 디자이너 이한수에게도 ‘구살돼지’는 특별한 작품이다.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줄곧 ‘눈을 더 크게, 더 해맑게, 더 귀엽게’ 그리라는 주문을 받아온 그에게 첫 만남부터 “많이 어두운 작품이 될 것”이라고 말한 허 감독은 귀중한 동료였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주인공 돼지 H의 디자인이었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 허 감독과 만나 시안을 발전시켰지만 좀처럼 답을 찾지 못했다. 체인을 걸치고 가죽재킷을 입은 돼지부터 ‘아기 돼지 삼형제’풍 돼지까지 그려봤지만 모두 어색했다. 이한수가 ‘내가 할 수 없는 일인가 보다’라고 생각할 무렵, 허 감독은 지금까지 그린 것을 모두 잊고 마음대로 해보라고 했다.

며칠 뒤 새로 그린 돼지 H를 본 허 감독은 씩 웃으며 “좋은데요?”라고 했다. 이한수는 그 표정이 “배우 한석규 같았다”고 회상했다. 막혔던 작업은 일사천리로 풀리기 시작했다. 이한수는 “마치 날개를 단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했다.

두 사람이 찾으려 한 것은 귀엽지도, 괴수 같지도 않은 동물 캐릭터였다. 이한수는 “처음엔 만화적인 외형을 시도했지만, 작업을 거듭하며 우리의 키워드가 ‘리얼리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관객이 캐릭터를 그저 의인화된 돼지로 보는 대신 “사람이나 돼지나 다를 바가 없는데”라고 느끼길 바랐다. 돼지와 인간, 빅풋의 경계가 무너지는 영화의 세계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려는 의도였다.

이한수는 허 감독이 “‘구살돼지’는 사실 작품을 만드는 나의 이야기”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혼자 살아남고, 낯선 무리에 들어갔다가 결국 혼자가 되면서도 자신이 되고자 하는 것을 향해 몸부림치며 나아가는 돼지 H의 모습에서 이한수는 허 감독을 떠올린다. “지금에 와선 혹시 (영화가) 다른 결말이었다면 감독님이 지금 여기에 계시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한수에게 ‘구살돼지’는 이제 “허범욱의 평행우주”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