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드라마에 울고, 예능에 웃고… 글로벌 ‘新한류 신드롬’ [심층기획-넷플릭스 상륙 10년 ‘명암’]

<상> 글로벌 OTT가 키운 세계표준 ‘K콘텐츠’

판권 판매 벗어나 세계 동시 공개
킹덤·오겜 등 콘텐츠 경쟁력 확인
피지컬100·흑백요리사로 장르 확대
시청률 저조했던 드라마 역주행도

자유로운 편성시간 가장 큰 장점
다양한 소재·장르 등 시도 가능
영화계선 ‘극장 대안’ 떠오르기도
일각, 제작 투자 지나친 의존 우려

고대 메소아메리카 문명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석조 투기장을 배경으로 참가자들이 악을 쓰며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붉은 흙빛 세트와 거친 숨소리, 스페인어로 터져 나오는 도발이 화면을 가득 채운 가운데, 지난 23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의 한 녹음 스튜디오에서는 화면 속 멕시코 출연자들의 모습 위로 한국어 목소리가 차례로 덧입혀졌다. 넷플릭스 예능 ‘피지컬: 100’ 멕시코판의 한국어 더빙 현장이다. 녹음이 끝나자 오디오 엔지니어가 출연진의 대사와 한국어 녹음을 맞췄다. 화면 속 멕시코 출연자들의 입 모양에 맞춰 한국어 대사가 흘러나왔다.

 

2023년 한국에서 제작된 ‘피지컬: 100’은 지난달 멕시코와 이탈리아에서 현지판으로 다시 만들어졌다. 두 작품은 공개 첫 주 넷플릭스 글로벌 비영어 쇼에서 각각 4위와 5위에 올랐다. 한국에서 만든 예능이 해외에서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제작돼 다시 국내 시청자를 만난 셈이다.

 

넷플릭스의 한국 진출 10년, K콘텐츠는 완성된 작품을 수출하는 데서 나아가 이야기와 포맷을 세계로 넓혀가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국내 제작 환경과 투자 방식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안방 시청률 넘어 세계 시장으로

 

넷플릭스 진출 이후 가장 큰 변화는 해외 유통 구조의 전환이다.

 

사실 한국 드라마의 해외 진출은 넷플릭스 이전에도 활발했다. ‘겨울연가’와 ‘대장금’ 등이 대표적이다. 다만 이때는 해외 콘텐츠 마켓이나 현지 방송사의 판매·편성을 통해 아시아에서 인기를 얻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의 등장으로 해외 진출 방식이 달라졌다. 국내 방영 후 국가별로 판권을 판매하는 데서 벗어나 처음부터 세계 시청자를 대상으로 작품을 제작하고 동시 공개하는 길이 열린 것이다.

 

가능성을 처음 확인한 것은 2019년 공개된 ‘킹덤’. 이후 ‘오징어 게임’의 세계적 흥행에 이어 ‘더 글로리’와 ‘흑백요리사’ 등으로 흥행 장르는 더욱 넓어졌다.

 

개별 작품의 성공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한국 작품에 대한 신뢰도 높아졌다. 시장조사업체 옴디아와 디지털아이에 따르면 2025년 4월부터 올해 3월까지 넷플릭스에서 한국 제작 콘텐츠의 시청시간은 121억시간으로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았다.

 

국내에선 낮은 시청률을 기록한 작품이 해외에서 기회를 찾기도 한다. 올해 SBS ‘오늘부터 인간입니다만’은 국내 최고 시청률 4.2%에 그쳤지만, 넷플릭스에선 23개국 톱10에 들었다.

 

고정민 미래산업전략연구소 소장은 “해외 공중파나 케이블TV 등을 통한 기존 수출 시장은 다소 줄었지만, 넷플릭스가 이를 대체하면서 한국 콘텐츠 제작 시장은 전체적으로 확대됐다”며 “해외 진출 과정이 짧아지고 편리해져 한국 콘텐츠에 대한 접근성도 높아졌다”고 평가했다.

◆넓어진 제작 기회, 커진 플랫폼 의존

 

넷플릭스가 불러온 유통 변화는 영화·드라마 제작과 공개 문법도 바꿔놓았다. 방송사의 편성 시간대와 회당 분량에 맞추던 제작 방식에서 벗어나 작품에 따라 회차·분량·공개 방식을 유연하게 정하고, 다양한 소재와 장르를 시도할 여지가 넓어졌다. ‘은중과 상연’의 최경숙 기획PD는 “이전에는 15세 시청자를 대상으로 기획해야 시청률도 높고 편성도 가능했기 때문에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볼 이야기’를 만들었다면, 넷플릭스 이후에는 훨씬 다양한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영화계에서는 OTT가 극장을 대신할 공개처이자 투자자로 떠올랐다. 코로나19 팬데믹(감염병 세계적 대유행) 시기 극장 개봉을 준비하던 ‘사냥의 시간’(2020)과 ‘승리호’(2021)는 흥행을 통한 투자금 회수가 불확실해지면서 넷플릭스에서 처음 공개됐다.

 

자칫 묻힐 뻔한 명작을 넷플릭스가 건져내기도 한다. 이창동 감독이 ‘버닝’ 이후 8년 만에 내놓은 ‘가능한 사랑’이 그렇다. ‘가능한 사랑’은 투자 확보에 어려움을 겪으며 제작이 무산될 위기에 놓였지만, 넷플릭스가 제작비 전액 투자와 극장 선개봉을 제안하면서 기사회생했다. 그리고 올해 베네치아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다. 넷플릭스가 지난 10년간 K콘텐츠의 양적 성장과 질적 도약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이끌어온 셈이다.

그러나 넷플릭스에 대한 의존도가 10년간 꾸준히 높아지면서 향후 한국 콘텐츠 산업의 자생력을 약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제작진·배우들의 넷플릭스 쏠림과 급속한 제작비 상승, 지식재산권(IP) 소유 문제가 한국 콘텐츠 산업의 숙제로 남았다.

 

고 소장은 “광고 시장은 줄어드는데 넷플릭스가 들어오면서 제작비, 특히 배우 출연료가 많이 올라 지상파와 케이블 방송사들이 드라마를 제작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넷플릭스가 제작비를 부담하는 작품에서 국내 제작사가 IP 권리를 확보하기 어려운 문제도 거론했다.

 

해외 판매에 유리한 특정 장르로 투자가 집중되면서 콘텐츠 다양성이 줄어들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이헌율 고려대 미디어학부 교수는 “넷플릭스가 한국 콘텐츠를 해외에 소개하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해외 판매에 유리한 콘텐츠에 투자가 집중되면서 국내 제작 생태계의 편중 현상도 커졌다”며 “제작비는 오르는데 투자가 줄어 제작되는 작품 수가 감소하면 넷플릭스가 선택하지 않은 다양한 콘텐츠는 제작될 가능성이 점점 줄어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