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 몰라도 괜찮습니다" 국립오페라단 ‘라인의 황금’ 연출 피오로니 [인터뷰]

“바그너에 관해 들어보셨을 법한 이야기는 모두 잊으십시오! 어렵다거나 복잡하다거나 전문가들만을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 말입니다.… 극장에 오기 전에 바그너를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그에게 마음을 열고 몸을 맡기시면 됩니다!”

 

‘라인의 황금’에서 ‘발퀴레’와 ‘지크프리트’를 거쳐 ‘신들의 황혼’까지. 연주시간만 약 15시간에 이르는 네 작품이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바그너가 26년에 걸쳐 완성한 연작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 이른바 ‘링 사이클’이다. 국립오페라단이 올해부터 2029년까지 4년에 걸쳐 전편을 무대에 올린다. 방대한 음악을 소화할 성악가와 오케스트라부터 신화 속 세계를 구현할 무대까지 제작 역량을 총동원해야 하는 대장정이다.

국립오페라단 ‘라인의 황금’ 포스터

그 첫 무대 ‘라인의 황금’을 만드는 이는 지난해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에서 발칙한 상상력을 펼친 연출가 로렌조 피오로니. 이 명민한 연출가는 27일 세계일보와 서면 인터뷰에서 “‘니벨룽의 반지’는 공연예술 역사상 가장 대담한 모험 가운데 하나”라며 “한국 관객이 낯설다고 여겼던 인물들에게서 문득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를 바란다. 그들을 보며 웃고 그들과 함께 고통스러워하며 아마 그들에게 섬뜩함도 느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다음은 공연을 앞두고 서면으로 진행한 피오로니와 일문일답.

국립오페라단 ‘라인의 황금’ 연습을 이끄는 연출가 로렌조 피오로니. 국립오페라단 제공

―국립오페라단의 링 사이클 도전 첫 무대를 맡았다. 당신에게도 각별한 의미가 있나.

 

“바그너가 무대에 올리고자 한 것은 다름 아닌 온 세상이었다. 그 아름다움과 잔혹함, 갈망과 재앙까지 말이다. 말하자면 그는 문명 전체의 해부도를 음악으로 그려내려 했다.

 

이런 작업을 서울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다. 우리가 들려주는 것은 머나먼 독일의 신화가 아니라 우리 인간의 꿈과 두려움, 사랑과 권력을 향한 굶주림에 관한 이야기다. 바그너의 신들은 게르만식 이름을 지녔을지 몰라도 그들이 품은 모순은 지극히 인간적이다. 어쩌면 우리가 인정하고 싶은 것보다 훨씬 더 우리와 가깝다.

 

내게 정말 가슴 뛰는 일은 바그너를 한국에 데려오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 그를 새롭게 살아 숨 쉬게 하는 것이다.”

국립오페라단 ‘라인의 황금’ 연습을 이끄는 연출가 로렌조 피오로니. 국립오페라단 제공

―바그너를 잘 모르는 관객에게 이 공연의 매력을 설명한다면.

 

“‘라인의 황금’은 환상적인 범죄영화이자 신랄하기 짝이 없는 가족 코미디이며 심리 스릴러인 동시에 거대한 모험담이다.

 

한 외로운 남자가 사랑받기를 원하다 범죄자가 된다. 막강한 지배자는 자기 형편으로 감당할 수도 없는 궁전을 짓게 한다. 두 형제는 돈 때문에 다투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때려죽인다. 모두가 자신에게 권력과 행복을 가져다주리라 믿는 신비로운 반지를 뒤쫓는다.

 

흥미진진하면서도 때로는 거의 기괴할 정도로 우스꽝스럽다. 전능하다는 이 신들이 이따금 완전히 망가진 가족처럼 행동한다. 여기에 압도적인 음악이 더해진다. 바그너는 인물들이 입 밖에 내는 말만 작곡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말하지 않고 감추는 것까지 작곡한다. 이번 연출은 강렬한 이미지와 유머, 풍부한 감각적 표현과 영화 기법을 활용해 이 세계에 생명을 불어넣으려 한다.”

 

북유럽 신화와 게르만 서사시를 바탕으로 한 ‘니벨룽의 반지’에서 ‘라인의 황금’은 비극이 시작되는 서막이다. 라인강 처녀들에게 구애하다 조롱당한 난쟁이 알베리히는 사랑을 포기한 자만이 황금으로 세상을 지배할 반지를 만들 수 있다는 비밀을 듣는다. 그는 사랑을 저주하고 황금을 훔쳐 반지를 만든다. 한편 신들의 왕 보탄은 거인 형제에게 발할라 성을 짓게 하면서 처제이자 젊음의 여신인 프라이아를 대가로 약속한다. 성이 완성되자 보탄은 프라이아 대신 넘길 황금과 반지를 알베리히에게서 빼앗는다. 이에 알베리히는 반지를 차지하는 자에게 불행과 죽음이 닥치리라는 저주를 내린다.

‘라인의 황금’ 무대 이미지. 국립오페라단 제공

―연출노트 제목이 ‘세상은 얼마인가’다. 이 작품의 본질은 무엇인가.

 

“내가 붙들고 있는 것은 섬뜩할 만큼 단순한 질문이다. 모든 것에 가격이 매겨지는 세상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사랑에도, 인간의 몸에도, 심지어 생명에도 가격이 매겨진다면 말이다.

 

알베리히는 사랑받고 싶어 한다.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대신 세상을 지배하려 한다. 보탄은 가족에게 빛나는 미래를 지어주고 싶어 하며 이를 위해 다른 사람들을 기꺼이 희생시키려 한다. 두 사람 모두 권력을 행복으로 착각한다. 마음속 결핍을 무언가 소유하는 것으로 메울 수 있다고 믿는다.

 

황금은 이 사람 손에서 저 사람 손으로 옮겨가고 그때마다 불행은 커진다. 사회 전체를 감염시키는 바이러스처럼 작용한다. 보탄과 알베리히는 섬뜩할 만큼 닮았다. 한 사람은 위에서 지배하고 다른 사람은 아래에서 올라온다. 둘 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 하면서 인간성을 잃어버린다.

 

어쩌면 이것이 ‘반지’의 진정한 비극일 것이다. 모든 것을 돈으로 살 수 있게 된 사회는 어느 순간 가치와 가격을 구별하는 능력을 잃어버린다. 이것은 먼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우리의 현재다.”

 

―당신은 “바그너가 4분 남짓한 전주곡으로 세상을 창조했다”고 썼다. 그런데 이번 무대는 라인강 대신 방 안에 홀로 있는 알베리히로 시작한다. 어떤 의도인가.

 

“바그너는 단 하나의 음으로 온 세상을 창조한다. 더없이 시적인 발상이다. 나는 이 세계가 바깥이 아니라 한 인간의 내면에서 생겨난다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래서 허름한 방에 있는 외로운 남자 알베리히로 시작한다. 자기 자신 말고는 더 이상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다. 카메라가 그의 몸을 관찰한다. 피부가 거대하게 확대되고 흉터는 산맥으로, 체모는 숲으로, 피부 주름은 강이 흐르는 풍경으로 바뀐다. 한 외로운 인간의 피부에서 라인강 바닥이 생겨난다.

 

그러고 나서 삶의 기쁨과 재치, 에너지가 넘치는 라인의 처녀들이 등장한다. 이들에게는 알베리히가 잃어버린 것이 있다. 바로 가벼움이다. 그는 그들의 육체뿐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까지 갈망한다. 그것을 얻는 데 실패하자 갈망은 폭력으로 변한다.

 

카메라는 단순한 기술적 수단 이상이다. 아주 작은 인간을 거인으로 만들 수도 있고 막강한 지배자가 실은 보잘것없고 초라한 사내임을 폭로할 수도 있다. 어떤 시점에서 보여주느냐가 곧 권력이기 때문이다.

 

바그너는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영화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의 음악은 회상과 복선, 시점 전환을 활용한다. 오케스트라는 때로 무대 위 인물들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바그너의 오케스트라는 어쩌면 오페라 역사상 최초의 보이지 않는 카메라일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바그너는 특정 인물이나 사물, 생각과 연결된 짧은 선율을 반복하고 변형해 이야기를 이어간다. 인물이 말로 밝히지 않은 속내나 과거 사건을 관객은 음악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피오로니가 오케스트라를 ‘보이지 않는 카메라’에 빗댄 이유다.

 

이번 공연은 로타 쾨닉스가 지휘하고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가 연주한다. 보탄 역은 올렉산드르 푸슈냐크와 이상민이, 알베리히 역은 사무엘 윤과 양준모가 번갈아 맡는다. 프라이아는 다니엘라 쾰러·임세경이, 보탄의 아내 프리카는 김선정·양송미가 연기한다. 무대 위 카메라는 성악가들의 미세한 표정과 몸짓까지 스크린으로 옮긴다.

 

 

 

―성악가들에게 특히 강조하거나 세밀하게 주문한 연기가 있나.

 

“무대에서 신화 속 기념비 같은 존재들을 보고 싶지 않다. 모순과 약점, 갈망을 품고 때로는 끔찍한 결정을 내리는 인간을 보고 싶다. 알베리히는 단순한 악당이 아니다. 무엇보다 어딘가에 속하고 싶어 절박하게 애쓰는 인간이다. 관객이 앞에서는 그를 혐오했을지라도 뒤에 가서는 문득 연민을 느끼게 되기를 바란다.

 

보탄 역시 양심 없는 도박꾼이자 상습적인 거짓말쟁이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저 음흉한 폭군도 아니다. 그에게는 매력과 재치,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왜 그를 따르는지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그 점이 그를 위험하게 만든다.

 

프리카는 결코 잔소리하는 아내가 아니다. 어쩌면 그 집안에서 가장 영리한 사람이다. 다가오는 재앙을 내다보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을 듣지 않는다.

 

특히 관심을 두는 것은 인물이 입으로 주장하는 것과 마음속으로 느끼는 것이 다른 짧은 순간들이다. 미소가 위협을 감출 때. 강한 모습을 보이려는 몸짓 뒤로 문득 두려움이 드러날 때다. 카메라가 얼굴에 가까이 다가가면 미세한 눈길 하나가 큰 몸짓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전할 수 있다. 성악가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인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연기하지 마세요. 그 인물의 비밀을 연기하세요. 그들이 감추고 싶어 하는 것을요.’ 내게 진정한 연극은 바로 거기서 시작된다.”

 

―원작은 신들의 의기양양한 발할라 입성으로 끝난다. 이를 장례식으로 바꾼 이유는 무엇인가.

 

“이 신들의 승리를 믿어서는 안 된다. 로게는 이 결말을 지켜보며 더 날카롭게 말한다. ‘자신들의 존속이 그토록 굳건하다고 믿는 자들이 제 종말을 향해 서둘러 가는구나. 저들과 어울려 일한다는 것이 거의 부끄러울 지경이다!’

 

마지막에 압도적인 음악이 울려 퍼지고 무지개가 나타난다. 보탄은 가족과 함께 새 성에 들어선다. 모든 것이 멋져 보인다. 하지만 그 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사람들은 속임을 당하고 모욕당하고 약탈당하고 죽임을 당했다. 한 여성은 지불 수단으로 흥정의 대상이 됐다. 한 형제는 자기 형제를 때려죽였다. 그런데도 이제 축하를 하자는 것인가. 어쩌면 이것이 권력의 가장 무서운 능력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승리의 이미지로 바꿔버릴 수 있다는 것 말이다. 이번 무대에서는 성대하고 화려한 장례식을 통해 그렇게 한다.

 

정확히 누구를 매장하는지는 의도적으로 열어두려 한다. 단서 하나를 슬쩍 넣어두기는 했다. 신들의 일족이 ‘승리’하는 순간 이미 시작되고 있는 몰락과 쇠락을 보여주는 것일까. ‘라인의 황금’의 이 결말에는 사실상 ‘신들의 황혼’의 마지막을 암시하는 단서가 이미 들어 있는 것일까.

 

권력이 언제나 범죄 위에 세워진다면 여기서 무덤에 묻히는 것은 인간성일까. 시정(詩情)일까.

 

권세 있는 한 가문이 모여 조의를 표하고 악수한다. 이 일족의 마피아적 구조가 드러난다. 보탄 역시 일종의 마피아 대부다. 가족에게 보호와 안전을 약속하지만 그 대가로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한다. 발할라는 그의 요새이자 외부인의 출입을 막은 전용 주거단지다. 이 사회는 우아한 검은 정장을 입고 시체를 밟고 넘어간다. 끔찍한 것은 권력자들이 어쩌면 진심으로 애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그들은 이전과 똑같이 행동한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라인의 처녀들 목소리를 듣는다. 어쩌면 바그너의 세계에서 여전히 진실을 말하는 존재는 죽은 자들뿐일지도 모른다.”

 

―어떤 오페라연출가는 바그너가 본질적으로 연극인이라 ‘링’ 연출이 모차르트 오페라보다 오히려 쉽다고 했다. 동의하나. ‘라인의 황금’만의 연출하는 재미와 어려움은 무엇인가.

 

“바그너가 엄청난 규모로 미래의 연극을 꿈꾼 선구자였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차르트보다 연출하기 쉽다는 것일까. 꽤나 무리한 주장이다. 바그너가 그토록 어려운 것은 바로 그의 음악 안에 이미 믿기 어려울 만큼 많은 연극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오케스트라는 기억하고 반박하며 미래를 예감한다. 때로는 무대 위 인물들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말하자면 바그너는 장면 전환과 회상, 클로즈업을 작곡한다. 무엇보다 모순을 작곡한다. 인물이 자신의 결백을 우리에게 납득시키려 애쓰는 동안 음악은 그 인물의 실체를 폭로할 수 있다.

 

바그너는 우리가 그저 바라볼 수 있는 세계를 만들지 않는다. 바라보면서 의심하게 되는 세계를 만든다. ‘라인의 황금’은 끊임없이 장르를 바꾼다. 거의 실험적인 설치미술처럼 시작했다가 에로틱한 코미디가 되고 스릴러로, 신랄한 가족 서사로, 마침내 비극으로 바뀐다. 나는 그 점을 사랑한다.

 

그래서 우리 무대도 쉼 없이 변한다. 골판지 상자와 쓰레기에서 거대한 도시가 생겨난다. 작은 인간들이 카메라를 통해 괴물이 된다. 알베리히는 고질라가 되는 꿈을 꾸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가 자기 형제와 함께 쓰레기 속을 기어 다니는 모습을 본다. 우스우면서도 상당히 비극적이다. 가장 큰 도전은 이 엄청난 음악적·시각적 상상력을 인간을 아주 정밀하게 그려내는 연극과 결합하는 데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실제 자신보다 더 큰 존재가 되려 애쓰다가 오히려 섬뜩할 만큼 작아지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공연이 끝났을 때 관객들이 무엇보다 한 가지를 원하게 되기를 바란다. 이 이야기가 다음에는 어떻게 이어지는지 반드시 알고 싶다고 말이다.”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10월 29일부터 11월 1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