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벌 불원’ 문턱 못 넘은 수사… 피해자 보호도 무력했다 [심층기획-가장 가까운 가해자, 관계성 범죄]

(상) 신고해도 못 막았다

제주 등 관계 범죄 6건 분석 결과
피해자 의사에 기대 종결 잇따라
“처벌불원과 무관 분리 조치해야”
대전 前 연인 살해 혐의 남성 구속

가정폭력 임시조치 위반 1406건
스토킹 접근금지 위반도 1103건
스마트워치 실효성도 도마 올라
가해자 제재 중심 제도 개선 시급

‘피해자 보호는 무력했고 범행 전 가해자에 대한 형사절차는 피해자의 처벌불원 문턱을 넘지 못했다.’

 

이달 전국에서 잇따른 관계성 범죄는 이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관계성 범죄는 배우자·연인 등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폭력·학대범죄다. 지난 12일 제주에서 전 연인인 60대 남성 A씨에게 살해당한 여성은 범행 당시 스마트워치를 착용하고 있었지만 소용없었다. A씨는 이를 뜯어버린 뒤 범행을 저질렀다. 피해 여성은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5월까지 A씨를 4차례 신고했지만 경찰은 사건 접수 거부나 처벌불원을 이유로 종결했다.

 

11일 서울 송파구에서 장모를 흉기로 찔러 살해한 혐의를 받는 김성우(26)에게 납치된 아내도 가정폭력 신고로 스마트워치를 지급받았지만 범행 당시 꺼져 있었다. 제주·송파 사건만이 아니다. 이달 발생한 전북 전주, 충남 아산, 경기 성남 분당, 대전 등 신고·보호조치 이력이 있는 관계성 범죄 6건을 분석해보니 피해자의 처벌불원 의사에 기대 사건을 종결하거나 보호조치가 작동하지 않는 양상이 반복됐다. 전문가들은 피해자 의사와 무관하게 가해자를 즉각 분리하도록 보호·형사처벌 절차를 분리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스토킹 피해 신고를 했던 여성을 살해한 혐의(살인)를 받는 40대 남성이 27일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대전 동부경찰서 유치장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처벌 원치 않는다” 멈춘 수사

 

24일 대전 중구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된 40대 여성은 지난해 10월 스토킹을 신고해 긴급응급조치를 받고 스마트워치를 지급받았다. 그러나 20여일 뒤 가해자와 화해했다며 처벌불원 의사를 밝히고 스마트워치를 반납했다. 경찰은 불송치 결정했고 같은 해 12월 다툼 신고도 현장 종결했다. 대전지법은 27일 살인 혐의를 받는 가해 남성에 대한 구속영장을 도주 우려를 들어 발부했다.

 

13일 충남 아산에서 숨진 채 발견된 여성의 6월 교제폭력 신고도 처벌불원으로 불송치됐다. 19일 분당에서 전 남편에게 흉기 공격을 당한 60대 여성은 사흘 전 신변보호를 신청하며 남편을 자극할까 우려해 사건 접수는 고사했다.

 

스토킹은 2023년 반의사불벌 조항이 폐지돼 피해자 의사와 무관하게 수사할 수 있다. 가정폭력 임시조치도 피해자 의사가 요건이 아니다. 경찰은 지난해 교제폭력 대응 매뉴얼에서 피해자 의사만으로 현장종결하지 말라고 했지만, 현장은 여전히 이에 기대고 있다.

◆지켜지지 않는 보호조치

 

13일 전북 전주에서 아내를 살해한 70대 남성은 법원의 스토킹 잠정조치 1∼3호를 모두 받은 상태였다. 100m 이내 접근금지도 그를 막지 못했다. 경찰은 고령이고 직접 폭력이 없었다는 점 등을 고려해 구금하지 않았다.

 

27일 국민의힘 권영진 의원실이 경찰청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가정폭력 임시조치 위반은 2023년 861건에서 지난해 1406건으로 늘었다. 올해는 1∼9월에만 1394건이다. 조국혁신당 박은정 의원실 자료에 따르면 스토킹 잠정조치 2·3호(100m 이내 접근·연락 금지) 위반도 2023년 636건에서 지난해 1103건으로 1.7배가 됐다. 올해 1∼8월은 953건이다. 국민의힘 박상웅 의원실도 경찰이 법원 결정을 거치지 않고 직접 내리는 가정폭력 긴급임시조치 위반이 올해 1∼9월 703건으로 지난해 연간 715건에 육박했다고 지적했다.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친밀관계 폭력의 가해자는 피해자의 개인정보뿐 아니라 부모와 가족이 어디에 사는지까지 아는 경우가 많다”며 “이런 관계에서 처벌을 원하는지 묻는 것 자체가 피해자를 매우 취약한 상황에 놓이게 한다”고 말했다. 그는 “현장에서 가해자를 체포하지 못하고 처벌불원 의사까지 확인한 뒤 경찰관이 돌아가면 결국 가해자와 피해자만 다시 남게 된다”고 덧붙였다.

 

한민경 경찰대 행정학과 교수는 “스마트워치는 가해자를 물리적으로 분리하지 못해 궁여지책으로 지급하는 수단”이라며 “기술만으로는 범행을 막을 수 없다”고 말했다.

 

독일은 경찰이 현장에서 일정 기간 가해자를 분리하고 사후에 법원 승인을 받는다. 한 교수는 “피해자를 보호하는 절차와 가해자의 형사처벌을 구하는 절차는 반드시 연동될 필요가 없다”며 “가해자를 왜 즉각 분리하지 못하는지를 먼저 따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찰도 기존의 피해자 보호 중심 대응에서 가해자 제재·격리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제도 개선을 추진하고 있다. 경찰청은 관계성 범죄 4만3712건 중 2만8396건(65%)에 대한 전수조사를 완료하고 위험도가 높은 203건에 구속영장을, 284건에는 유치를, 203건에는 전자장치 부착을 각각 신청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