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잃은 슬픔을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운데 사건 이후 그 문제를 알리고 변화를 요구하는 일까지 가족의 몫이 됐죠.”
2023년 인천 스토킹 살인사건 유족이자 범죄피해자연대 활동가인 이경숙씨는 27일 세계일보와 인터뷰에서 “동생이 남긴 증거를 모으고 재판에 참석하고 국회와 관련 기관을 찾아다니느라 기존 근무시간을 유지하기 어려워 결국 직업까지 바꿨다”며 이같이 말했다.
연인이나 배우자를 향하던 관계성 범죄는 두 사람 사이에서 끝나지 않았다. 가해자의 위협은 피해자의 부모와 형제자매, 자녀에게까지 향했다. 가족은 피해자를 지키려다 공격받았고, 때로는 피해자를 다시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 됐다.
세계일보가 최근 5년간 선고된 가정폭력·교제폭력·스토킹 관련 판결문 중 피해자 가족이 범행 대상이 되거나 협박 수단으로 이용된 사건 21건을 분석한 결과, 16건에서 배우자·연인 외 가족을 직접 겨냥한 범죄에 대해 유죄가 선고됐다. 피해자의 부모가 범행 대상인 사건이 12건으로 가장 많았고, 형제자매 4건, 자녀·의붓자녀 3건 순이었다. 여러 가족이 피해를 본 사건은 관계별로 중복 집계했다.
가족이 범죄에 휘말리는 양상은 다양했다. 가족이 직접 폭행·협박·스토킹의 대상이 되거나, 가족에게 위해를 가하겠다고 위협해 배우자·연인을 통제하는 사례가 있었다. 신고·수사 이후 가족을 상대로 보복 범행을 저지른 사건도 확인됐다.
연인에 대한 분노가 가족 살인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2024년 12월 경북 상주에서 교제하던 여성을 강제로 차에 태우는 남성을 본 시민이 경찰에 신고했다. 출동한 경찰에 피해 여성이 폭행 피해를 진술하고 범행에 사용된 소주병을 제출하자, 피의자는 다음 날 새벽 여성의 60대 부친을 흉기로 살해하고 모친까지 살해하려 했다. 법원은 피해자의 수사 협조에 대한 보복 목적을 인정해 지난해 7월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가족이 범행을 신고하거나 피해자를 보호하려다 직접 공격받은 사례도 있다. 2023년 3월 경기 남양주에서는 헤어진 사실혼 배우자의 아버지를 협박한 남성이 이를 경찰에 고소한 여성의 친오빠에게 보복협박한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2022년 경기 안산에서는 연인에 대한 보복폭행 과정에서 이를 말리던 피해자의 친언니가 폭행당했다. 법원은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했다.
2024년 2월 인천 미추홀구에서도 처가 식구들이 아내의 가정폭력 피해를 신고하자 80대 장모와 50대 처제의 집을 찾아가 “다 죽여버린다”고 협박한 사건이 있었다. 경찰의 경고에도 이 남성은 재차 찾아갔고, 법원으로부터 장모와 처제에 대한 접근·연락금지 결정을 통보받은 다음 날에는 장모가 다니는 교회까지 찾아가 연락했다. 법원은 지난해 4월 장모·처제에 대한 스토킹범죄 등을 유죄로 인정해 징역 3년을 선고했다.
보호조치가 내려진 뒤에도 가족 대상 범행이 발생해 유죄가 인정된 판결은 6건이었다. 이 중 2건은 가족도 보호 대상에 포함됐지만, 나머지 4건은 포함되지 않았다.
지난해 전남광주 여수에서는 사실혼 관계였던 여성의 집에 대한 접근금지 임시조치를 받은 남성이 무단으로 들어가 18세 딸을 결박하고 다치게 했다. 딸에게 어머니를 부르는 메시지를 보내도록 한 뒤 귀가한 여성을 흉기로 찔렀다. 딸은 접근금지 보호 대상은 아니었다. 법원은 딸에 대한 특수중체포치상 등과 여성에 대한 살인미수 등을 유죄로 인정해 징역 12년을 선고했다.
가족을 보호할 법적 수단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정폭력 임시조치와 스토킹 잠정조치는 일정 요건 아래 피해자 가족도 보호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가족을 겨냥한 관계성 범죄의 정확한 피해 규모는 파악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경찰은 동일 가해자에 의한 가족의 추가 피해와 가족을 접근금지 등 보호 대상에 포함한 신청·결정 건수를 따로 관리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경찰은 ‘관계성 범죄 위험도 분류표’에 가족에 대한 살해 협박을 고위험 판단 항목으로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송파 장모 살해 사건을 계기로 실시 중인 전국 관계성 범죄 전수점검에서도 가족 대상 위협과 보호조치 현황은 별도로 집계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경찰청은 “전수점검 중 피해자 가족 대상 위협 등을 확인하고 필요시 피해자 가족 대상 보호조치를 실시하고 있으나 따로 집계는 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권준성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조사연구원은 “피해자 본인뿐 아니라 가족에게까지 위해를 가할 가능성이 있는지도 함께 평가해야 한다”며 “가족에게 협박하거나 원치 않는 연락·방문을 반복했는지, 가족을 이별의 원인으로 지목하거나 보복을 언급했는지 등 종합적으로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