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을 충분히 못 자면 부모님이 자랑스러워 하셨다. 학창시절에는 친구들과 얼마나 적게 잤는지 겨뤘고, 잠을 적게 자는 것이 내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를 보여주는 표시라고 생각했다. 대학 때도 주변이 그런 인식이었다.” (에픽하이 타블로)
“쉼 없이 활동하면서 에너지가 다 소진됐다고 느꼈을 때 정신적으로 무너졌다. 병원에 갔더니 불면증, 우울증 등 여러 진단을 받았다.” (악뮤 이수현)
유명 뮤지션들의 이러한 수면 관련 고백은 누구라도 겪을 수 있는 요즘의 수면 현실을 보여주는 사례다. 특히 20대는 수면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가장 걱정하면서도 가장 극단적인 수면 패턴을 보이는 모순 속에 살고 있다. 밤에는 스마트폰을 보며 늦게 잠들고 주말 몰아 자는 사이, 청년들의 정신 건강에 빨간불이 켜졌다.
◆20대 수면의 역설…7시간 넘게 자도 피곤함은 그대로
수면 관련 조사를 보면 20대는 양적으로 적지 않은 수면시간을 확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질적으로는 문제를 겪고 있다.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가 지난달 25일 발표한 ‘2026 한국 웰니스 보고서’에 따르면 응답자들의 하루 평균 수면시간은 6.3시간으로 미국수면의학회(AASM) 권장 성인 수면시간인 7시간에 못 미쳤다.
나이가 많을수록 평균 수면시간이 줄어드는 경향을 보였다. 연령대별로 유일하게 20대의 7시간 이상 자는 비율이 54.7%로 절반을 넘겼다.
그러나 주목할 점이 있었다. 수면 장애 증상을 묻는 항목에서 30대 이상은 ‘자는 도중 자주 깸’을 가장 많이 꼽은 반면, 20대는 ‘충분히 자도 피곤함’이 다른 증상을 제치고 1위(56.5%)를 차지했다.
◆스마트폰 사용과 심리적 스트레스가 취침 시간 늦춰
한국인은 유독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늦은 편이다. 슬립테크 기업 에이슬립이 발표한 ‘2026 대한민국 수면 리포트’에 따르면 한국인의 평균 입면 시각은 오전 12시 51분으로 미국 평균(오전 12시 24분)과 아시아 평균(오전 12시 26분)보다 늦다. 특히 토요일에는 평균 입면 시각이 오전 1시 8분으로 더 늦었다. 국가데이터처의 2024 생활시간조사에서도 20대의 평균 입면 시각은 오전 12시 37분으로 가장 늦게 나타났다.
에이슬립 관계자는 “세계 최상위 수준의 스마트폰 보급률과 심야시간대 높은 사용률이 입면 지연의 주요 요인”이라며 “특히 낮 동안 받은 스트레스에 대한 보상심리로 취침을 의도적으로 미루는 ‘보복성 취침 지연’이 사회 전반에 확산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수면 지연은 전자기기 사용만이 원인이 아니다. 앞선 KB금융지주 보고서에서는 수면 방해 요인(복수응답)으로 ‘잠들기 직전 휴대전화 사용’(45.9%)과 ‘심리적 스트레스’(45.5%)가 근소한 차이로 1~2위를 다퉜다. 20~40대에서는 ‘심리적 스트레스’가 ‘잠들기 직전 휴대전화 사용’을 앞섰다.
특히 20대는 일상 속 부정적 감정을 경험한 비율이 높았다. 스트레스, 감정적 소진, 이유없는 불안과 걱정, 외로움·고립감의 경험이 가장 높은 연령대였다. 건강관리 관심 분야도 타 연령대와 달리 20대가 ‘수면’을 가장 많이 꼽았다. 또 정신건강에 대한 우려도가 전 연령 가운데 20대에서 가장 높게(49.3%) 나타났으나 정신건강을 가장 관리하지 않는 것으로도 드러났다.
◆주말 몰아자기, 우울증 위험 높여
평일에 쌓인 ‘수면 빚(Sleep Debt)’을 주말에 몰아 자면서 갚는 습관은 정신건강 악화로 연결된다.
지난해 고려대 의대 예방의학교실 이요한 교수 연구팀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22 한국 청년 삶의 실태조사’ 자료를 분석해 수면과 정신건강 간의 연관성을 조사하고 대한의학회지에 게재했다.
연구 결과 청년층(19~34세)의 38.5%는 평일에 수면 부족(7시간 미만 수면)을 경험했으며 이들은 주말에 2시간 이상 더 자는 경향이 있었다. 평일과 주말의 수면 시간 차이가 2시간 이상인 그룹은 불행감과 우울증을 느끼거나 자살 생각을 경험한 비율이 높았다.
특히 우울증 증상 비율은 수면 차이가 1시간 미만인 그룹(17.7%)보다 2시간 초과 그룹에서 28.9%로 높게 나타났다. 평일에 권장 수면 시간을 자지 않는 청년들은 이러한 연관성이 더욱 강했다. 평일 7시간 미만 자면서 주말에 2시간 이상 더 자는 청년은 우울증 발생 위험이 1.9배 높았다.
연구팀은 평일과 주말의 수면 시간 차이가 정신건강 악화와 양방향의 연관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주말에 수면 시간을 늘리면 사회적 시차와 생체 리듬 불균형이 발생해 정신건강 악화에 영향을 미치고, 청년들이 주중에 겪는 학업·직장 관련 스트레스와 압박감이 심리적 고통을 야기해 불규칙한 수면 패턴이나 수면 장애로 이어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규칙적인 수면이 핵심…주말에도 기상 시각 일정해야
전문가들은 취침·기상시각을 평일과 주말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이 수면의 질을 높이고 정신건강을 유지하게 하는 핵심이라고 입을 모은다. 만일 충분히 자도 피곤함을 느낀다면 평일과 주말의 취침·기상시각을 파악하는 것이 좋다.
연구팀은 “평일과 주말 수면 시간 차이가 적고 충분한 수면 시간을 유지하는 것이 젊은 성인의 정신 건강 증진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동헌 에이슬립 대표는 “같은 시간을 자더라도 언제 잠드느냐에 따라 수면의 질이 달라질 수 있다”며 “수면 시간뿐 아니라 수면 타이밍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함께 개선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대한수면학회는 건강한 수면을 위한 수면 위생법으로 잠에 드는 시각과 기상 시각을 일정하고 규칙적으로 할 것을 권고한다. 또 과도한 스트레스와 긴장을 피하고, 잠자리에 들었을 때 20분 이내로 잠이 오지 않는다면 일어나서 가벼운 독서 등으로 이완하는 과정을 잠들 때까지 반복하라고 말한다. 다만 밤에 잠을 못 잤더라도 기상시각은 일정하게 유지할 것을 권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