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타워] 서희, 그리고 김정관

통상정책은 돈이 전부 아냐… 다양한 셈법 따져야

서울 서초구 국립외교원 내엔 고려 성종 때 재상 서희(942∼998)의 흉상이 있다. 흉상을 설치한 정부 의도는 명백하다. 대군을 이끌고 고려에 침범한 요나라(거란) 장수 소손녕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담판을 벌여 압록강 동쪽, 강동 6주까지 얻어낸 ‘외교 달인’ 서희의 실력을 외교관들이 본받아야 한다는 주문이다.

서희는 달변으로 적장을 설득시킨 외교관만으로 기억하면 안 되는 인물이다. 오히려 국가전략을 설계한 총전략가에 가깝다.

이도형 산업부 차장대우

만주를 지배한 강대국에 한반도는 중요한 전략적 공간이었다. 훗날 금나라와 명나라, 청나라도 그랬듯이 후방 안정을 위해서다. 오늘날 중국이 많은 외교적 비용을 치르면서도 북한의 강력한 후원자로 남아 있는 게 이 때문이다. 10세기 당시 송나라를 노리던 요나라도 뒤에 있는 고려의 존재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고려는 송나라와 교류하고 요나라는 적대했다.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이 요나라가 선물한 낙타를 굶겨 죽였을 정도다.



993년 거란이 고려를 쳐들어온 1차 여·요 전쟁에서 서희와 소손녕 간 담판의 핵심은 두 나라 관계를 어떻게 하느냐였다. 서희의 ‘고구려 계승’ 주장 속엔 요나라와 국교를 맺을 테니 압록강 일대 영토 통제권을 묵인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소손녕은 속뜻을 눈치채고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요나라가 간과한 건 강동 6주의 지정학적 중요성이었다. 평양 앞 고구려의 마지막 방어선이 이곳이었다. 지정학상 충돌은 필연이라고 본 서희는 강동 6주의 중요성을 크게 인식했다. 서희는 2년 만에 이 지역을 요새화한다. 강동 6주는 이후 여·요 전쟁에서 방어선 역할을 제대로 했다. 귀주대첩이 여기서 벌어졌다. 서희는 상대가 원하는 걸 내주면서 상대가 가치를 모르는 것을 받아냈다. 전략은 이렇게 해야 한다.

올해 산업통상부 국정감사에서 김정관 장관은 대미투자 중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사업을 놓고 “새로운 전략적 가치가 생겼다”고 했다. 대미투자 프로젝트 중 상업적 합리성이 가장 낮고 위험 부담은 가장 큰 것으로 평가되는 이 사업의 가치가 중동분쟁으로 인한 LNG 수급 다변화 필요성에 따라 바뀌었다는 것이다. 정부가 매번 강조한 ‘상업적 합리성’, 즉 ‘돈’의 관점에서 본 언급이다.

하지만 3500억달러 규모의 대미투자 사업을 단순히 돈의 잣대로만 바라봐야 할까. 중간선거 승리가 점쳐지는 미국 민주당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막무가내식 대미투자 압박 움직임에 제동을 걸려는 낌새가 없다. 민주당이 의회를 장악하더라도 제조업 부흥과 투자 유치라는 미국의 정책 기조 자체가 바뀌지 않을 공산이 크다는 얘기다. 트럼프 대통령 임기도 2년이나 남았다. 대미투자 부담은 미국 중간선거 결과와 무관하게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대미투자 협상에서 중요한 건 천문학적인 현금을 지불하는 대가로 우리가 무엇을 얻느냐이다. 예컨대 통상뿐 아니라 외교·안보 영역까지 시야를 넓혀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 불확실성을 대폭 줄일 수 있는 방안도 도출한다면 좋지 않겠는가. 이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에도 도움이 돼 결과적으로 경제 활성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상대가 있는 협상에서, 그것도 강대국을 상대로, 실타래처럼 얽힌 산업과 통상, 외교, 안보 관련 이해를 풀어내 우리의 국익을 극대화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대체 불가 대한민국’ 시대를 선언한 정부라면 국민 보기에 3500억달러 대미투자가 아깝지 않은 결과물이 나올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대미투자 협상 선봉장인 김 장관의 무운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