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관두고 도망치듯 이사… 피해자가 떠안은 ‘관계탈출 청구서’ [심층기획-가장 가까운 가해자, 관계성 범죄]

(중) 살아남은 뒤

“새집 주소 숨기려 시내 곳곳 배회”
가해자 따라올까 귀갓길도 공포
집 옮기며 날린 보증금 6200만원
카페 폐업에 구직마저 막혀 ‘막막’

가해자와 헤어져도 또 다른 고통
“하루 5번 전자발찌 접근 알람 떠”
보호조치 ‘시한부’… 길어야 9개월
“일상회복 위해 가해자 구속 필요”

#1. 자영업자 A(54)씨는 지난해 12월 퇴근 후에도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자신의 차로 두 시간 넘게 시내를 돌며 미행하던 가해자의 차량을 따돌렸다. 다시 가게로 돌아와 차를 세운 뒤에는 택시를 타고 기사에게 “8000원어치만 시내를 돌아달라”고 부탁한 후 귀가했다. 새집 주소까지 들킬까 두려워서였다. A씨는 스토킹 피해자였다. 가해자에게 접근금지 조치가 내려지기 전까지 한 달간, A씨는 귀가할 때마다 약 8000원의 택시요금을 썼다고 했다.

 

#2. 경기 용인에 사는 김모(41)씨는 스토킹 가해자를 피해 두 차례 이사했다. 처음 마련한 전세보증금 1억6000만원은 다음 이사 때 9800만원으로 줄었다. 운영하던 카페를 닫으면서 수입이 끊긴 탓이다. 보증금 차액으로 빚을 갚고 생활비를 충당했지만 그마저 지난해 바닥났다. 가해자를 피해 거처를 옮기는 동안 생계 기반도 무너졌다. 최근 가해자가 1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자 김씨는 다시 이사를 준비하고 있다. 이번 목적지는 제주도다.

 

피해자는 가해자와 관계를 끊는 데 돈이 든다. 집을 옮기고 일터도 잃는다. 안전을 지키느라 생활비까지 불어난다. 스토킹과 교제폭력 등 관계성 범죄 피해자들이 가해자와 헤어진 뒤에도 쉽게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다. 이들에게 이별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비용의 시작이었다.

◆관계성 범죄 피해자에 전가된 청구서

A씨는 28일 “이제는 약 없이는 당분간 못 살 것 같다”고 토로했다. 가해자와 교제하던 당시 관계를 끊어내지 못해 두 차례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고, 경찰에 신고한 뒤에도 스토킹 피해가 이어지면서 같은 상황이 반복됐다. A씨는 “내가 한 번 죽어야 앞으로 발생하는 피해 여성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그런 잔다르크 같은 마음이 생길 정도로 엄청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올해 1월부터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를 받고 있는 A씨는 피해 경험을 다시 꺼내는 것조차 힘들어 했다. 인터뷰 당일에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처방받은 약을 복용해야 했다. 가해자를 피하는 동안 생계는 무너졌다. 스토킹은 이별을 고한 8월 말부터 심해졌지만 A씨는 곧바로 경찰에 신고하지 못했다. 과거 가정폭력을 겪으면서 관련 처벌이 약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보복도 두려웠다.

고소를 미루던 그가 고소장을 낸 것은 지난해 12월16일이다. 경찰 조사가 시작된 후 평소 최소 500만원이던 가게 매출은 100만원 안팎으로 곤두박질쳤다. 고소 이후에도 가해자와 그 지인들이 찾아오거나 주변을 배회하면서 정상적인 영업이 어려웠다.

남양주 스토킹 살해범 김훈의 신상이 공개됐다. 경기북부경찰청 제공

상황이 달라진 건 올해 3월 남양주 스토킹 살인 사건이 터진 뒤였다.

이재명 대통령이 스토킹 신고를 신속히 전수조사하고 피해자 보호 조치를 최대한 빨리 취하라고 주문하자, 경찰이 가게에 찾아와서 피해자 보호 조치를 하고 가해자에 위치추적 전자발찌를 채웠다. 고소장을 제출한 지 104일 만이다.

그날 전자발찌 부착 소식을 들은 A씨는 안도감에 “집에 와서 엉엉 울었다”고 했다. 다른 피해자가 목숨을 잃은 뒤에야 자신도 국가의 보호를 받게 됐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보호조치가 강화된 3월 이후 영업을 재개했지만 지금은 문을 잠근 채 예약 손님만 받고 있다.

가해자에게 전자발찌가 채워진 뒤에도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 가해자가 위험반경 1㎞ 이내에 접근했다는 경보는 매일 울리고 있다. A씨는 “알림이 하루도 안 뜬 날이 없다”며 “하루에 다섯 번도 뜬 적이 있다”고 말했다.

가해자의 접근을 감시하는 전자장치가 오히려 ‘가해자가 여전히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을 매일 확인시켜줬던 셈이다. A씨는 가해자가 자신의 반복적인 이동 경로를 파악하고 접근하는 것 아닌지 의심할 정도라고 했다.

이런 보호조치에도 기한이 있다. 스토킹처벌법상 접근금지와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 등 잠정조치는 최초 3개월 이내로 결정할 수 있고, 두 차례에 걸쳐 각각 3개월씩 연장할 수 있다. 원칙적으로 최장 9개월이다. 수사와 재판이 장기화하면 형사절차가 끝나기도 전에 잠정조치가 종료돼 피해자 보호에 공백이 생길 수 있다.

◆피해자 지원에 한계… 일상회복 어려워

피해자 지원제도가 있지만 정작 이 같은 손실을 충분히 메우지 못하고 있다.

대구여성의전화가 지원하는 다른 피해 여성은 가해자와 관계를 끊은 뒤 교통비조차 없어 심리상담을 받으러 가지 못한다. 이 여성은 지난 3월 온라인 게임을 통해 알게 된 남성과 교제하면서 직장을 그만두고 서울의 집을 정리해 연고 없는 대구로 이주했다. 기존 주거지의 보증금으로 새집을 구해 동거했지만 폭언과 협박, 폭행 등에 시달렸다. 이별 후에도 주거지 인근에서 가해자를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고, 긴급주거지원 임시숙소에 입소했다.

관계를 정리하고 나니 생활비는 남아 있지 않았다. 직장을 그만두고 이사하는 과정에서 가진 돈을 대부분을 썼고, 정신건강까지 나빠져 경제활동도 어려운 상태다. 대구여성의전화는 긴급 식량 등을 지원하고 있지만 교통비 같은 기본적인 생활비까지 지원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했다.

가해자를 피해 세 번째 이사를 준비 중인 김씨 역시 경제활동이 끊기면서 생활고에 시달렸다. 김씨는 스토킹에 시달리다 결국 운영하던 카페를 폐업했다. 그가 직접 계산한 2024년 9월부터 12월까지의 영업 손실은 약 742만원이다. 이사를 거듭하며 중개수수료와 포장이사비 등으로도 수백만원을 썼다.

서울에 사는 이모(32)씨는 스토킹 피해에 구직도 쉽지 않다. 가해자의 활동 구역인 강남·송파·광진·강동 지역에는 지원조차 못하고 있다. 가해자는 스토킹 혐의로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씨는 언제 다시 나타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면증과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그는 “침대에 누우면 벽에 설치된 인터폰이 보였는데, 가해자가 찾아왔을 때의 기억 때문에 인터폰이 눈에 들어오는 것조차 싫어 액자를 사다 가려놓았다”며 “일상의 물건이 공포의 대상으로 남았다”고 설명했다.

송경인 대구여성의전화 대표는 “가해자의 삶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피해자 보호 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며 “가해자가 구속돼야 그 기간 동안 이사도 하고, 개인정보 변경도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긴급주거지원 사업에도 식비와 의류비, 교통비 예산이 없어 당장 입을 옷조차 없는 피해자를 지원하기 어렵다”며 “머물 공간을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피해자가 일상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생활비까지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