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공교육 서비스 개선 시위를 벌이고 있는 15세 학생 살로메 레뇨는 뉴욕타임스(NYT)에 “매달 지출 내역을 보면서 ‘이걸 할 수 있을까?’ 또는 ‘저걸 살 여유가 있을까?’라고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주거난 항의 시위에 참여하고 있는 20대 청년 무라나 몬테이로는 NYT에 “일을 해도 집을 살 돈도 없고, 가정을 꾸릴 수도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나”라고 반문했다. 이탈리아 북동부 도시 파도바에서 시위에 나선 22세 대학생 스텔라 살리스는 “시위 운동이 국경을 초월하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기를 바란다”며 유럽이 청년의 목소리를 듣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최근 유럽 전역을 뒤덮은 시위는 제각기 다른 이유에서 시작됐다. 프랑스에서는 공교육 서비스 개선을, 스페인에서는 주택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목소리에서 시위가 비롯됐다. 이탈리아와 포르투갈에서는 고물가와 주거난에 대한 반발이 거리로 이어졌다. 시위의 불씨는 제각각이지만, 거리에 나선 성난 얼굴에는 공통점이 있다. 청년이다. 그들의 분노는 어디서 비롯됐고, 각국은 왜 답을 내놓지 못하는가.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위를 통해, 유럽의 해묵은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더 나은 삶’ 보장하던 ‘사회적 계약’의 붕괴
유럽 국가가 국민들에게 약속하던 ‘사회적 계약’이 깨진 것이 근본 원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열심히 일하면 더 나은 삶을 보장한다는 국가의 약속이 더는 통하지 않는다는 체감이 청년세대로 번졌다는 것이다. 부실한 교육과 불안정한 고용 속에 내 집 마련의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자신이 받을 수 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연금을 위해 세금을 납부하고 있는 상황. 영국 가디언은 유럽 청년층의 삶을 이렇게 묘사했다.
아란차 곤살레스 스페인 전 외무장관은 이탈리아 신문 코리에레델라세라와의 인터뷰에서 스페인과 프랑스 시위를 언급하면서 “(각국의 시위대는) 공통된 불씨, 즉 ‘사회적 계약의 붕괴’를 내세우고 있다”며 “유럽에서는 경제가 복지와 사회적 평등을 창출한다는 개념 자체가 산산조각났다”고 분석했다.
이들의 분노에는 유럽 사회가 쌓아 온 역사가 배경에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서유럽은 높은 세금을 내는 대신 탄탄한 복지와 공공 서비스를 보장받는 복지국가 모델을 구축했다. 1945년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 이른바 ‘영광의 30년’ 동안 서유럽의 국민들은 고성장과 완전고용을 누렸다. 이 시기에 경험한 ‘자식은 부모 세대보다 더 잘 산다’는 믿음은 국가와 국민 사이 사회적 계약으로 굳어졌다.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지난 지금, 이제는 청년들이 거리로 나와 국가의 계약을 지키라고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숫자는 시위대의 이 같은 체감을 뒷받침한다. 유럽연합(EU) 통계청 유로스타트에 따르면 올해 8월 기준 25세 미만 청년의 실업률은 EU 평균 15.4%로, 전체 평균(6.1%)의 2.5배에 달한다.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지에서는 20%가 넘는 청년 실업률을 기록 중이다. 스페인은 최근 10년간 주택 가격이 약 80% 올랐지만 임금 상승률은 30% 선에 그쳤다. 포르투갈에서는 같은 기간 집값이 두 배 넘게 뛰었다.
그러나 계약을 지킬 곳간은 비어 가고 있다. 유로스타트는 올해 1분기 기준 EU 전체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이 82.9%로 전분기(81.8%) 대비 1.1%포인트 급등한 것으로 집계했다. 이는 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을 60%로 제한한 EU 재정준칙 기준을 한참 웃도는 규모다.
복지를 유지하거나 넓히려면 재정 여력이 있어야 하는데, 경기 침체가 만성화되고 고령화로 인한 비용 지출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구멍이 뚫린 지갑’으로 이를 마련하기는 쉽지 않다. 범유럽 싱크탱크 유럽외교관계위원회(ECFR)의 셀리아 벨린 파리 사무소장은 가디언에 “쉽게 말해, 정부의 대답은 ‘돈이 없으니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이라면서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재정만의 문제가 아니다. 유럽의 인구는 빠르게 늙고 있고, 이민자 문제는 사회 갈등의 대상이 됐다. 고령화로 연금과 의료 지출이 불어날수록 교육과 주거 같은 청년 대상 투자는 뒤로 밀릴 수밖에 없다는 불만도 쌓였다. 여기에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집권 이후, 군사비 지출 확대라는 미국발 지정학적 위기까지 겹쳤다. 숙제는 계속 쌓여가는데, 이를 풀 힘이 ‘늙고 가난해진 유럽’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진단이다.
시위 대응을 둘러싼 논란도 인권을 강조하던 서방의 모순된 목소리라는 지적이 나온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지난 1월 이란 당국이 반정부 시위대를 폭력적으로 진압하자 “시위대의 평화적 권리를 존중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대규모 시위가 진행된 이튿날인 지난 19일, 그는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고 자국의 폭력 시위를 집중 거론하며 이를 강경하게 대응하겠다고 천명했다. 이란 당국은 즉각 마크롱 대통령을 향해 ‘이중잣대’라며 비판했다. 아바스 아라그치 이란 외무장관은 엑스(X)에 “프랑스의 미래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대통령님”이라고 비꼬았다.
◆거리에서 투표소로… ‘우파 득세’ 가속화되나
시선은 앞으로 유럽에서 치러질 선거로 향한다. 시위의 분노가 정책 변화의 동력이 되기보다는, 강력한 정부와 이민자 문제에 강경 대응을 앞세운 우파의 약진으로 흡수될 공산이 크다. 다음 달 29일 조기 총선을 치르는 스페인에서는 중도우파 제1야당 인민당(PP)과 극우 복스(VOX)가 상원 단일화에 합의하는 등 연대를 통해 정권 탈환을 노린다. 내년 4월 프랑스 대선 여론조사에서는 극우 국민연합(RN)의 마린 르펜 후보가 큰 격차로 1위를 달리고 있다. 내년 중 예정된 이탈리아 총선에서도 조르자 멜로니 총리가 속한 우파 연정이 재집권에 도전한다.
가디언은 향후 선거에 대해 “EU의 근간을 뒤흔들 수 있는 급진적 우경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상황을 내다봤다.
반론도 있다. 이번 대규모 시위를 ‘유럽의 실패’로 읽는 것은 지나친 일반화라는 것이다. 알베르토 알레만노 교수는 가디언 기고를 통해 유럽 각국 시위의 원인과 요구는 서로 다르며, 이를 하나의 폭력적 청년 봉기로 묘사하는 것은 유럽이 통치 불가능하다는 잘못된 인식을 심게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개별 국가의 문제를 유럽 전체의 실패라는 이야기로 둔갑시키는 것은, 트럼프 행정부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등 유럽의 결속 약화로 이득을 보는 세력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주장했다.
유럽 전역을 뒤덮은 시위가 ‘모순’을 드러낸 위기의 징후인지에 대한 해석은 엇갈린다. 청년층의 분노에 대한 국가의 대답이 복지국가 모델을 다시 설계하는 계기가 될지, 극단주의에 기름을 붓는 결과로 이어질지는 앞으로의 선거 결과와 정부의 선택에 달려 있다. 이는 ‘늙어버린 유럽’의 생존 역량을 가늠할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