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넘는 가해자 못 막는 접근금지… 처벌 강화도 하세월 [심층기획-가장 가까운 가해자, 관계성 범죄]

(하) 제도가 남긴 틀

긴급임시조치 어겨도 과태료 그쳐
2026년 1∼9월 위반 사례만 703건 달해
가해자 격리 조치도 최장 6개월 뿐
피해자 처벌불원 땐 보호조치 약화

21대 국회 개정안 41건 결국 폐기
22대도 발의안 43건 중 40건 계류
반의사불벌 폐지·처벌 강화 공전
“친밀관계폭력 통합법 제정돼야”

“가해자에 대한 강한 접근 제재와 처벌만이 재범을 예방할 수 있겠죠. 가해자는 구속도 안 된 채로 재판은 길어지고 불안한 상태만 지속되는 게 저(피해자)의 삶이에요.”

스토킹 피해자 김모(41)씨는 자신을 지켜주지 못한 제도의 빈틈을 메우기 위해 강력한 처벌과 접근 제재가 필요하다고 29일 말했다. 김씨는 동거남의 폭행과 재물손괴를 경험하고 거주지를 여러 차례 옮겼다. 하지만 가해자는 일터에까지 찾아와 업무를 방해했다. 구속되지 않은 가해자는 재판에 출석하지 않았다. 그의 소재가 파악되지 않으면서 1년여 동안 재판은 지연됐다.

최근 관계성 범죄로 여성들과 주변 지인이 숨지는 사례가 이어지면서 제도 개선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다. 가정폭력처벌법(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 적용되는 ‘반의사불벌제’ 폐지, 최대 6개월에 그치는 가·피해자 격리 조치 손질, 처벌법의 목적을 ‘가정 보호’에서 ‘피해자 보호’로 개정하는 방안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피해자가 가해자 처벌 결정

원민경 성평등가족부 장관은 전날 국회 성평등가족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가정폭력처벌법의 반의사불벌 제도와 스토킹 사건의 처벌불원 의사에 따른 피해자 보호조치 약화를 막기 위해 (관계성 범죄에 대한) 반의사불벌제 폐지를 적극 찬성한다”고 말했다. 원 장관은 또 가해자에 대한 전자장치 부착 명령이 없어 가정폭력처벌법을 개정하거나 별도의 법을 제정할 필요가 있다고도 강조했다. 가정폭력처벌법 제9조는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 검사가 공소를 제기할 수 없도록 규정한다.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 역시 “가해자가 형사법에서 규정하는 범죄를 저질렀는데, 피해자에게 처벌 의사를 묻는 것 자체가 매우 이상한 일”이라며 “보복을 두려워하거나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경우나 지인이나 부모·가족에게도 위해가 가해질 것으로 예상되는 경우에는 처벌불원 의사를 밝힐 수밖에 없는 구조적 취약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문제의식은 10여년 전부터 제기됐다. 2015년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의 ‘가정폭력처벌특례법 실효성 제고를 위한 정책제언’에서 김은경 선임연구위원은 “1997년 가정폭력관련법 제정 이후 임시조치 및 피해자보호명령 등 각종 제도가 도입됐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장치가 부족해 처분의 실효성이 도전받고 있다”며 “피해자가 처벌을 기피하는 이유를 살펴보지 않은 채 ‘피해자 의사존중’을 기계적으로 해석해 딜레마에 빠졌다”고 지적했다.

◆가정보다 피해자 보호하도록

입법목표의 모순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도 있다.

 

가정폭력처벌법 제1조는 ‘파괴된 가정의 평화와 안정을 회복하고 건강한 가정을 가꾸며 피해자와 가족구성원의 인권을 보호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한다. 가해자의 형사처벌보다 가정 복귀가 더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가정폭력사건은 형사법정이 아닌, 가정법원으로 넘어간다. 공소청으로부터 제출받은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가정폭력 사범 3명 중 1명은 가정보호사건으로 송치돼 전과도 남지 않았다. 가정폭력 사범 5만4794명 중 가정보호 사건으로 송치된 건 1만8232명이었다. 불기소는 2만6468명이었다. 정식 재판에 넘겨진 건 1997명으로 3.6%뿐이었고 이 중에서 구속기소는 1.0%뿐이었다.

가정법원으로 넘겨지면 ‘접근 제한’, ‘친권 행사 제한’, ‘보호관찰’, ‘시설 감호·치료·상담 위탁’ 등의 처분이 내려질 수 있다. 최장 6개월의 처분 기한이 끝나면 가해자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허 입법조사관은 “폭력 상황에서 친밀성은 오히려 매우 위험한 요인이라 친밀 관계에서의 폭력을 가중처벌하는 국가도 있다”라며 “하지만 우리나라는 반대로 친밀 관계를 화해의 요인으로 보고 사적 영역에 남겨두는 경향을 보인다”고 짚었다.

사건 발생 직후 가·피해자 분리 조치 위반에 대한 처벌도 약하다.

 

가정폭력 재발 우려에 법원 결정을 기다리기 어려운 상황에서 경찰이 내리는 접근금지·퇴거 명령인 긴급임시조치 위반은 300만원 이하의 과태료 처분에 그친다. 올해 1∼9월 가정폭력 긴급임시조치 위반은 703건을 기록했다. 이보다 중한 임시조치는 검사 청구와 법원 인용까지 필요해 즉각적인 위험요인 제거가 어렵다. 미국에서는 최소 25개 주 이상에서 가정폭력 현장에 출동한 경찰이 가해자를 식별하면 피해자 의사와 관계없이 반드시 체포하도록 의무를 부여하는 ‘의무체포제’를 운영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교제 중인 대상의 과거 폭력 전과 기록을 조회하도록 해 위험을 방지하는 ‘클레어법’이 시행 중이다.

◆법 개정안 쌓이는데 통과 하세월

국회에는 ‘입법목적 수정’, ‘반의사불벌 적용 배제 규정 신설’, ‘가정폭력사범 임시조치 위반 또는 재범 시 징역형 등 형량 명시’ 등을 담은 가정폭력처벌법 개정안이 21대, 22대에 걸쳐 수십건 발의됐다. 21대 국회에서는 51개 발의안 중 41건이 기한 만료로 폐기됐고, 22대에는 발의안 43건 중 40건이 계류 중이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는 “수천 명이 죽어도 바뀌지 않는 법이 가정폭력처벌법”이라며 “국회와 정부는 그동안 법 개정을 미루고 무능력, 무책임하게 방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친밀관계 전반을 규정하고 처벌하는 법안으로 전환해 입법해야 한다는 논의도 시작됐다. 강은영 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법안이 가정폭력과 스토킹을 따로 규정하고 있지만 현장에서는 사실혼과 교제 관계, 법적 혼인 관계에 따라 적용할 수 있는 조치가 각기 다른 점이 어렵다고 토로한다”며 “교제 폭력, 가정폭력, 스토킹 등 관계성 범죄가 하나의 법안에 들어가면 현장의 어려움도 줄어들고 가정폭력처벌법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도 해소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