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대학 축제 무대 뒤, 서른을 코앞에 둔 래퍼는 “고등학생 아니냐”며 반말을 들었다. 2005년에는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주차장 주임으로 1년 6개월을 일하며 처음으로 따박따박 월급을 받았고, 부서장 발령 제안까지 받았다. 가리온의 MC메타(본명 이재현·55)는 다시 음악하자는 한마디에 회사에 “그동안 감사했습니다”라는 짧은 인사를 남기고 망원동 작업실로 돌아가 ‘무투’(武鬪)를 썼다. 그로부터 21년, 그는 3집까지 14년이 걸렸던 가리온의 4집을 1년 반 만에 11곡 전부 직접 프로듀싱해 내놓았다. 지난 7월14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작업실에서 그를 만났다. 인터뷰 두 번째 편으로, 다음은 일문일답.
◆텔레토비 무대와 110V
―1998년 KBS 다큐멘터리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에는 길거리 공연을 보는 기성세대가 힙합을 부정적으로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30년간 현장에서 피부로 느낀 편견이나 억압이 있다면.
“편견과 억압까지는 모르겠다. 그런 장소에 가지도 않았고 그런 데서 우리를 찾지도 않았으니까. 당시 활동은 신촌의 작은 공연장 ‘마스터플랜’에 한정돼 있었다. 외부 섭외가 들어오기 시작한 게 1999년쯤이다. 대학 축제, 기업 행사. 대전 삼성플라자에서 공연이 들어와서 ‘우리를 찾는 데가 있네’ 하고 버스를 대절해 갔다. 1층 로비 이벤트 공간이었는데, 무대가 텔레토비가 나와야 할 것 같은 풍차 돌아가는 무대였다. 그건 이해한다. 그런데 의자를 다 깔아놔서 낮에 쇼핑 오신 아주머니, 할머니들이 앉아 계셨고, 다 주무시더라. 어릴 때라 관객에게 에너지를 주고 싶어서 ‘손 들어, 소리 질러’ 하며 방방 뛰는데 다들 고개가 뒤로 넘어가 계셔서 당황했다.”
―대학 축제는 어땠나.
“부당하다, 불합리하다고 느낀 건 거기서 제일 많았다. 우리를 하대하는 것. 1999년이면 내가 스물여덟, 스물아홉으로 서른이 다 된 나이였다. DJ가 스크래치하는 턴테이블이 일본 테크닉스 제품이라 110V 전원이 필요하다. 그래서 다운트랜스(변압기)를 들고 다니거나 음향 업체 것을 써야 하는데, 안 가져왔다고 ‘왜 안 가져오셨어요’가 아니라 ‘야, 너네 왜 110 안 가져왔어’ 하고 초면에 반말을 한다. 왜 반말하냐고 하면 고등학생들 아니냐고 한다. ‘내가 내일모레 서른이오.’ 그 시절엔 다 박스 티에 통 넓은 바지, 큰 신발, 노란 머리에 빡빡머리에 모자를 쓰고 다녔으니 선입견이 있는 거다. 그런 일이 너무 잦아서 몇몇 친구들은 싸움으로 번지기도 했고, 그러면 또 안 좋게 소문이 났다.”
◆주차장 주임, 그리고 ‘무투’
―2집 수록곡 ‘무투’는 이번 다큐의 주제곡이기도 하다. 어떻게 쓰게 됐나.
“‘무투’는 무장투쟁의 줄임말이다. 1집을 내고 프로듀서와 헤어졌고, 회사도 프로모션을 이어가기 어려운 상황이 되면서 앨범을 내고도 활동을 못 하게 됐다. 30대 중반으로 들어서던 나이였다. 3남의 장남인데 두 남동생이 서울로 올라와 신촌에서 같이 살았다. 막내는 취업 준비생, 둘째는 취직해서 한창 바쁠 때였다. 막내가 끓여주는 된장국에 밥 먹으면서 ‘참치 없냐’ 하는 내가 미안했다. 우리 같은 팀은 음반보다 공연으로 수익을 내야 하는데 공연을 아예 못 하게 되니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신촌에 살았으니 근처 세브란스병원 주차장에서 아르바이트하던 래퍼들이 있었다. ‘형, 여기 꿀이에요. 일은 별로 안 힘든데 급여가 괜찮아요.’ 사람은 항상 필요하다기에 들어갔다.”
―오래 일했나.
“한 달 일했는데 외주업체 계약이 끝나서 회사가 없어졌다. 소개해 준 친구까지 다 잘렸는데 새로 들어온 업체가 나만 살리더라. ‘이재현씨는 같이 갑시다.’ 지금도 이유는 모른다. 그러더니 아르바이트 없이 전부 정직원으로 하겠다고 해서 정직원이 됐고 월급도 100만원 넘게 주더라. 열심히 했다. 1년 6개월을 하니 현실과 타협하는 기분이 들었다. 따박따박 월급 받아본 적 없는 사람이 매달 받아서 동생들과 생활비 쓰고 부모님께 용돈도 보내드리니 ‘이런 삶도 괜찮네’ 싶었다. 2004년, 2005년쯤이다. 그냥 이렇게 살고 랩은 가끔 할까 하던 차에 1집을 제작했던 분이 새 회사를 만들면서 연락이 왔다. ‘가리온 2집 합시다. 계속 거기 있지 말고.’ 눌러놨던 게 탁 터졌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지. 소장님이 많이 잡았다. 내가 주임이었는데 일을 잘해서 어느 대학에 주차 시스템 들어가는 데 부서장으로 발령 내려고 했다고. 월급도 오를 거라고. 그냥 ‘아니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하고 바로 돌아섰다. 망원동 작업실로 가서 프라이머리의 비트(반주)를 받아 곡을 준비했다. 그때 마음가짐이 그거였다. 다시 돌아간다, 제대로 무장하고 제대로 한번 투쟁해 보자.”
―‘무투’에서 가장 좋아하는 벌스는.
“제일 처음 시작하는 부분이다. ‘변화란 내가 선택했던 매타(每他) 라임의 함수, 공식의 증명으로 걸었던 건 내 마음의 말뿐’. 수학적인 느낌을 쓴 가사인데 나한테 변화는 늘 중요한 코드였다. 변화는 변질과 다르다. 본질은 추구하되 본질이 늘 한 군데서 가치를 갖는 건 아니니까, 시대에 따라 본질도 변화의 옷을 갈아입으면서 유지된다. 새로 나올 가리온은 변화가 중요한 공식이어야 하고, 내가 거기 넣을 핵심은 래퍼니까 내 가사다. 하나의 선언문처럼 쓴 거다.”
◆청년 래퍼들에게
―요즘 언더그라운드 청년 래퍼들을 만나고 주말마다 공연장을 찾고 있다. 아르바이트와 배달을 병행하며 마이크를 놓지 않는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내가 그런 얘기를 할 자격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비프리라는 래퍼가 있다. 음악을 굉장히 멋있게 하면서도 삶을 유지하기 위해 공사장 일 같은 다른 일을 병행한다. 그게 음악을 좋아하고 자기 음악에 프라이드와 애정이 있으니까 그걸 깨기 싫은 거다. 표현이 웃기지만 개똥밭에 굴러도 내 음악은 정승처럼, 내 음악에만큼은 자유를 주고 싶은 거다. 현실 문제 때문에 내 음악이 오염되거나 변질되는 게 싫은 거다. 그러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나는 노가다를 뛰건 똥밭에 구르건 상관없다. 그런 마인드가 멋있다고 보고, 나도 그렇게 살아왔고, 내 주변에 지금까지 음악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게 살아왔다. 물론 이게 맞다는 얘기는 아니다. 지금 젊은 뮤지션들은 다른 방식으로 자기 음악을 지키려고 다른 쪽에서 고통을 감내하는 게 많다고 본다. IMF 때 나는 음악을 만들고 그걸 갖고 10명도 채 안 되는 무대에 올라갈 때 ‘딱 나만의 세계, 나만의 공간’이라는 걸 확실히 느끼는 데서 오는 만족감이 컸다. 그러니까 지지 말고, 본인 음악의 가치와 거기서 얻는 만족과 행복을 추구하는 건 절대 비굴하거나 구차한 게 아니니까 쫄지도 말고. 젊지 않나. 즐겁게 했으면 좋겠다. 뭐든 즐거운 게 제일 좋으니까.”
◆“모두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2026년의 한국힙합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제일 어려운 질문이다. 거시적으로 볼 시야각이 크지 않으니 개인적인 감상만 말하면, 여전히 분투하고 있다. 모두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반어적인 표현이다. 대부분은 자기 가치를 증명하려는 거니까. ‘나 무가치하지 않아, 내 랩은 구리지 않아’를 어떻게든 증명해 내려는. 무가치하면 어떤가. 자기만족이 최우선 아닌가. ‘01410’은 32마디 벌스인데 마지막에 ‘거울 속의 래퍼가’라는 라인을 따로 떼놨다. 그 앞 라인이 ‘내 첫 팬이야’다. 그 말을 한 사람이 거울 속의 래퍼라는 거다. 실제로 그랬다. 홍대 T동 꼭대기 층 교수님 빈방에서 5년 가까이 살았는데 밤 10시 반이면 건물이 폐쇄돼 못 나간다. 새벽에 음악 틀어놓고 쓴 가사를 연구실 전신 거울 앞에서 제스처하면서 ‘멋있는데, 래퍼 같아’ 하고 혼자 그랬다. 그 내용이 그대로 담긴 거다.”
―지금 래퍼들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뜻인가.
“지금은 다 같이 있고 다 잘한다. 솔직히 요즘 제일 잘하는 래퍼는 중학생 래퍼 같다. 초등학생 래퍼들도 무시할 수 없다. K팝을 좋아하다가 짧게라도 랩을 소화하는 걸 보면 우리 때와는 아예 레벨이 다르다. 이해도도 높고 리듬 표현도 굉장히 좋다. 그래서 오히려 우리가 행운이었던 세대다. 아무도 안 하던, 아무도 없는 데서 우리끼리 하니까 못해도 ‘넌 무가치해’ 소리는 안 들었다. ‘이게 뭐지’가 더 컸으니까. 지금은 다 잘하니까 내가 무가치하지 않다는 걸 어떻게든 증명해야 한다. 그게 안타깝기도 하고, 그만큼 경쟁이 세지니 거기서 치고 올라오는 결과물은 굉장히 품질 관리가 되는 거겠지.”
―4집은 3집 이후 1년 반 만에 나왔다. 3집까지는 14년이 걸렸는데.
“14년 공백이라지만 가리온이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다. 예전부터 우리는 라이브형 팀, 음반 제작보다 라이브 무대가 최우선인 팀이라고 말해왔다. 무대를 이어가는 게 주된 활동인데 설 무대가 점점 줄고 노출이 적으니 공백기처럼 보였을 거다. 2024년 11월 27일 3집을 내고 ‘굳어 있던 톱니바퀴가 돌아가니 계속 돌리자’는 생각으로 이듬해 여름부터 조금씩 준비했다. 그러다 올해 초 인천에 살다 보니 인천음악창작소의 음반 제작 지원 공모를 봤다. 창작소에서 힙합이 선정된 건 우리가 처음이라 비트 메이커 같은 소스가 없어서 11곡을 내가 다 프로듀싱했다. 빈티지라는 컨셉을 놓고 작업한 건 아닌데 만들고 보니 그런 색이 보였다. 나도 50대 중반이고 나찰도 곧 50이 되니 우리 나이대에 어울리는, 에이징이 된 어른 힙합이다. 10대, 20대가 못 들을 음악은 아니다. 취향 맞으면 들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인터뷰 당하는 사람의 답은 어설프지만 지나온 시간을 짚어보는 건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이번 4집 앨범은 짧은 기간에 만들었지만 나찰과 나, 둘이서만 온전하게 만든 앨범이다. 많이 들어봐 주시면 감사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