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미국이 일종의 난기류를 겪고 있다.”
미셸 스틸 주한미국대사는 지난 21일 주한미국상공회의소 오찬에서 이같이 말했다.
미미한 갈등도 세심하게 순화해서 발언하는 외교가에서는 이례적일 정도로 직설적이었다.
엿새 뒤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종합감사장. 조현 외교부 장관은 이 발언에 대해 “비행기가 난기류를 지날 땐 안전벨트를 단단히 매면 문제가 없다고 했더니 스틸 대사도 동의했다”고 말했다.
같은 단어를 놓고 양국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말한 셈이다.
주한미군 2만8500명, 확장억제, 연합방위태세라는 한·미동맹의 근간은 그대로다.
하지만 동맹 현안에서 파열음이 잇따르면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신속한 조율과 면밀한 소통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늘어나는 갈등 이슈
현 정부 출범 이후 한·미 관계의 특징 중 하나는 시각차나 갈등이 드러난 사안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쿠팡 외에도 △지난 2월 주한미군 전투기 서해 훈련 △3월 정동영 통일부장관 ‘북한 구성 핵시설’ 발언 직후 미국의 대북 정보공유 일부 제한 △6월 북한 해킹 대응 한·미·일 사이버위협 실무그룹 회의에서 국가정보원 배제 △8월 한·미 연합 을지자유의방패(UFS) 연습 축소 △10월 정청래·진성준 의원 미국 비자발급 거부까지 사건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같은 현안들이 함께 얽히면서 영향을 주고받고, 이 과정에서 갈등은 개별 현안 차원을 넘어서서 동맹 전반으로 번지는 모양새다.
과거에는 군사 동맹과 외교·경제 현안을 분리했지만,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선 이같은 구분도 무너진 상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양국 간 높은 신뢰가 필요한 정보·안보 분야에서 문제가 불거졌고, 단기간 내 해결 기미도 안보인다는 점이다.
이종석 국가정보원장은 지난 29일 국회 정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정 장관의 지난 3월 북한 구성 핵시설 관련 발언 이후 미국의 대북 정보공유가 일부 제한된 사실을 인정했다.
앞서 지난 6월엔 미 워싱턴에서 열린 북한 사이버 위협 대응 한·미·일 실무그룹 회의에서 미국 측 반대로 국정원 관계자가 참석하지 못했다. 이달 초엔 주미대사관 파견 국정원 직원 일부의 비자 발급이 지연된 사실이 알려졌다.
국정원은 “이미 지난 일이다” “정보협력과는 무관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강경화 주미대사는 지난 12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정보공유 제한과 관련한 미국의 문제 제기에 한국이 미국의 기대만큼 이를 충분히 해소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언급, 해당 이슈가 장기화할 가능성을 내비쳤다.
전작권 전환도 한·미 시각차가 두드러질 요소로 꼽힌다.
한·미 국방장관은 지난 28일 회담을 갖고 올해 한·미안보협의회의(SCM)를 내년 초로 연기하고, 12월에 워싱턴에서 국방장관 회담을 하기로 합의했다.
한·미는 SCM 연기가 일정 문제라고 설명하나, 전작권 전환 속도에 대한 양측 이견이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나온다.
회담 전부터 제이비어 브런슨 주한미군사령관은 전작권 전환과 관련해 발언을 이어왔다.
이달 중순 “전작권 전환의 조건이 확실히 변했다”고 말한 데 이어 최근에는 “한국군 레이더에서 탐지한 정보를 일일이 복사해 미군 시스템에 입력하면서 발생하는 어떠한 지연도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브런슨 사령관은 27일(현지시간) 미국 하와이에서 열린 국방전자통신협회(AFCEA) 연설에서 “연합 시스템에 차질이 생길 때, 분명히 얘기하면 한반도에 이런 차질이 많은데, 대개 (원인이) 의지(부족)에 있는 것은 아니다”라며 “차질은 인적·절차적·기술적 측면에서 상호운용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브런슨 사령관은 긴밀한 두 동맹군이 똑같은 합동작전센터에 앉아 서로 다른 모니터를 보고 있으나, 적을 물리치기 위한 동일한 해결책을 도출해야 하는 상황이 모순적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열린 한미 정상회담 조인트 팩트시트(공동설명자료) 후속 안보협의도 멈췄다.
미국은 안보협의 1차 회의를 올해 6월에야 열었다. 2차 회의는 지금까지도 열리지 않았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갈 정도다.
안보 협의가 지연됐을 때, 이란 전쟁 때문이라는 설명이 있었으나 쿠팡 문제, 정보당국 간 갈등, 대미투자 합의 지연 등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신뢰’
정보공유 문제가 동맹의 핵심 현안인 이유는 높은 수준의 신뢰가 없이는 정보공유가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이 한국에 정보공유를 적극적으로 한다면, 한국은 미국 정찰위성이 하루에 몇 차례나 한반도를 지나가는지, 영상 분석 기술은 얼마나 발전했는지, 통신감청 능력은 어느 정도인지 등을 추론할 수 있다.
미국이 이같은 점을 감수하더라도 대북 정보공유를 계속 하게 하려면, 한·미 간 신뢰가 단단하게 자리잡아야 한다.
반대로 말하자면 신뢰가 흔들릴 경우 정보공유가 가장 먼저 영향을 받는다는 의미다.
실제로 한·미는 2000년대 이후 정보공유 문제로 여러 차례 마찰을 빚었다.
공유한 정보가 유출됐다는 미국측 문제제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공개되지 않았으나 미 국무부나 주한미군이 나서서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다만 이때는 동맹 관계를 고려해 물밑에서 갈등을 수습하려는 최소한의 수습 기조는 보였다.
그런데 이번 사안은 갈등 양상이 수면위로 올라왔다. 상당 기간 공개적으로 지속되고 있으며, 다른 현안들과 상호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과거보다 더 심각하다는 평가다.
미국의 한국에 대한 불신이 과거보다 높은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대목이다.
미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빅터 차 한국석좌는 블룸버그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정보 공유 제한을 둘러싼 갈등에서 가장 심각한 부분은 미국이 한국을 동맹국으로 신뢰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전작권 전환도 같은 맥락이다.
국방부는 올해 전작권 전환 로드맵을 완성하고 12월 한·미 국방장관 회담에서 조율을 거쳐 내년 초 SCM에서 전작권 전환 시점을 정하려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군이 전환 조건 충족이 미비하다고 지적하는 부분들을 충족할 계획을 로드맵에 담고, 이를 토대로 미국 측과 합의를 하려는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문제는 우리 측의 전작권 전환 로드맵 실행력과 지속 가능성에 대한 미국의 신뢰 수준이다.
한국에서 상당 기간 근무한 미군이나 미 외교관의 경우 한국이 정치적 환경 변화에 따라 외교·국방 분야에서 기류가 바뀌는 것을 경험한 바 있다고 전한다.
실제로 정권교체 과정에서 정부의 안보·국방정책이나 전력증강 계획이 기존과 달라지거나 지연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이는 정부 정책의 연속성 등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린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신뢰가 낮다면, 우리 측이 로드맵을 제시해도 미국 측은 전작권 전환 조건 충족 여부를 철저하게 검증할 가능성이 크다.
보완 계획·일정을 로드맵에 담는 것보다 단기간 내 조건 충족 실현을 더 선호할 수 있다는 의미다.
◆“문제 없다”고만 할 순 없어
미국과 이견이 드러나는 사안이 불거질때마다 정부는 “큰 문제가 아니다” “이견은 크지 않다”는 입장을 보여왔다.
하지만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 자체만으로 한·미 동맹 이상 징후는 감추기가 어렵다.
이를 해소해야 한다는 것은 모두가 공감하지만, 정치권에서 진단은 엇갈린다.
야권은 정부가 현실을 부정한다고 비판하고, 여권은 이견이 없을 수는 없다고 반박한다.
이재명 대통령은 국가 간에 이견이 있기 마련이라며 “국가간 관계에서 굴종적·사대적 태도를 지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언급대로라면 한·미 동맹에서 이견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이견이 불신·갈등으로 번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핵추진잠수함 건조, 원자력 연료 농축·재처리, 전작권 전환 등 미국에 요구할 것들이 적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인식이 생기면 우리 측이 뭔가를 얻기는 어렵다.
문재인정부 시절 핵추진잠수함 보유를 추진했으나 미국의 비협조로 경항공모함 건조로 선회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같은 문제가 재발하는 것을 막으려면 다양한 단위에서 긴밀하게 조율하고 소통하면서 미국의 불신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다.
한국의 정치적 변화에도 대미 현안 해결책이 일관되게 진행될 것이라고 믿게끔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실무진인 외교관과 군인이 마음껏 일할 수 있도록 정부와 정치권이 환경을 조성해줘야 한다는 지적이다.
고위급 단계에선 향후 두 달이 분수령이다.
다음달 중국 선전에서 열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12월 미 워싱턴 국방장관 회담과 마이애미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잇따른다.
국가 최고위급 차원의 대면 소통 결과에 따라 대미 현안도 큰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고위급 접촉 과정에서 시스템보다 측근에 더 의존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특성을 감안하는 접근법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조현 장관은 ‘한·미 관계 난기류’를 언급한 미셸 스틸 주한미국대사 발언에 대해 “비행기가 난기류를 지날 땐 안전벨트를 매면 된다”고 말했다.
난기류를 무사히 해치고 나오려면 안전벨트의 신뢰성과 품질이 높아야 한다.
하지만 그 안전벨트가 무엇인지에 대한 양국의 답은 아직 같지 않다. 그 답을 찾으려는 노력과 환경 조성이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