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알고 숨겨두고 싶다”… 백화점 소믈리에가 극찬한 ‘나파의 전설’ 필립 토그니 [최현태 기자의 와인홀릭]

롯데백화점 경민석 칩 바이어 인터뷰

미슐랭 2스타 소믈리에에서 백화점 MD로

“필립 토그니 보르도 전설 슈발블랑 떠 올라”

롯데백화점 칩 바이어 경민석 소믈리에. 최현태 기자

백화점 소믈리에는 레스토랑이나 바의 소믈리에와 역할이 사뭇 다릅니다. 테이블 앞에서 와인을 따르는 대신 매출표와 씨름하고, 매장 동선을 짜고, 다음 시즌에 팔 와인을 기획합니다. 관리자의 입장에서 매출을 올리려면 다양한 시각으로 다양한 기획을 쏟아내야 합니다. 국내 최다 점포를 운영하는 롯데백화점의 경민석 칩 바이어를 만나 백화점 소믈리에의 세계를 엿봅니다.

 

경민석 칩 바이어 2018년 코리아 소믈리에 오브 더 이어(Korea Sommelier of the Year) 우승 장면.

◆미쉐린 2스타 소믈리에, 백화점 MD 되다

 

경민석 칩 바이어는 레스토랑 소믈리에로 먼저 실력을 쌓았습니다. 미쉐린 2스타 레스토랑 정식당에서 헤드 소믈리에로 일했고, 2016년 ‘코리아 소믈리에 오브 더 이어’ 톱10에 오른 데 이어 2018년 제4회 대회(모엣 & 샹동 어워드)에서 정상에 올랐습니다. 같은 대회 내추럴 와인 부문까지 거머쥐며 실력을 인정받았습니다.

 

그가 롯데백화점으로 옮긴 것은 2021년 5월입니다. 롯데백화점이 ‘와인 마스터’로 그를 영입했고, 첫 공식 프로젝트로 롯데백화점 최초의 무알코올 와인 4종을 선보였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백화점 생활이 어느덧 6년 차에 접어들었습니다.

 

롯데백화점 칩 바이어 경민석 소믈리에. 최현태 기자

지금 그가 속한 곳은 MD본부 F&B 부문입니다. 이름은 소믈리에지만 하는 일은 MD(상품기획자)에 가깝습니다. 상품 개발은 기본이고 어떤 브랜드를 입점시킬지 고르는 일, 이익률과 매출 관리, 매년 열리는 대형 행사 기획, 매장 리뉴얼과 신규 오픈까지 모두 그의 몫입니다. “우스갯소리로 ‘MD가 왜 MD인 줄 아느냐, 모든 걸 다 해서 MD다’라는 말이 있어요. 행사장 세팅하는 날 전날 저녁에 가서 먼지를 쓸기도 하고, 별걸 다 하죠. 하하”

 

경민석 칩 바이어(오른쪽 두 번째) 2017년 국제 영 소믈리에 대회 국가대표 선발전 우승뒤 기념 촬영.

관리하는 매장 규모도 만만치 않습니다. 백화점 와인 매장만 34곳, 와인 매장이 있는 아웃렛과 몰까지 합치면 42곳 정도입니다. 인터뷰 전날에도 대전에 다녀왔습니다. 수입사가 바뀌는 매장이라 철거 범위를 조율하고, 새로 들어올 콘텐츠와 레이아웃을 잡아주는 일이었습니다. 잠실점 같은 주요 점포를 리뉴얼할 때는 어떤 콘텐츠를 넣을지, 집기는 어떻게 놓을지, 고객 동선은 어떻게 짤지까지 직접 구상합니다.

 

레스토랑 시절과 가장 달라진 점은 ‘고객과의 거리’입니다. “예전에는 최전선에서 고객 만족도를 최상으로 끌어올리는 데 집중했다면, 지금은 제가 직접 와인 서비스를 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상품 자체로, 가격까지 고려해서 고객에게 매력 있어 보이게 만드는 고민을 정말 많이 합니다.” 물론 현장과의 끈을 놓은 것은 아닙니다. 우수 고객을 대상으로 와인 클래스를 열어 접점을 만들고 있습니다.

 

2026 더 블라인드 현장.
롯데백화점 2회 더 블라인드 화이트 와인 1위 리버 테라스 소비뇽블랑.  홈페이지

◆책임지고 고르는 ‘더 블라인드’

 

가장 힘들었던 기억은 롯데백화점의 블라인드 와인 경연 ‘더 블라인드’를 처음 열 때입니다. 더 블라인드는 수입사들에게 국내에 아직 들어오지 않은 와인을 출품받아 블라인드 테이스팅으로 순위를 매기고, 1위 와인을 롯데백화점 단독 상품으로 내놓는 기획입니다. 2024년 10월 서울 한강 세빛섬에서 ‘서울의 심판’이라는 이름으로 첫 대회를 열었는데, 기댈 플랫폼이 없다 보니 섭외부터 예산 확보까지 모두 발로 뛰어야 했습니다. 수입사와 언론에 협조를 구하는 것은 물론 연예기획사까지 찾아다녔습니다. “저희끼리 모여서 하면 차별점이 없으니까, 어떻게 하면 관심을 끌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그렇게 첫 대회에는 일본 와인 만화 ‘신의 물방울’의 원작자 아기 타다시 남매를 초청했습니다. 2025년 6월 열린 2회 대회에는 김경문·김진범 소믈리에와 함께 연예계 소문난 애주가인 배우 송지효가 심사위원으로 나섰습니다. 지난 6월 5일 시그니엘 서울에서 열린 올해 대회에는 래퍼 한해와 미쉐린 1스타 레스토랑 ‘소울’의 김희은·윤대현 셰프 부부가 함께했습니다. 유튜브 영상 촬영까지 직접 챙기다 보니 원래 업무의 범위를 훌쩍 넘는 일들을 새로 해야 했습니다.

 

아기 다다시(가바야시 신)
아기 다다시(가바야시 준코).

더 블라인드 심사는 두 단계로 진행합니다. 먼저 롯데백화점 소믈리에들이 출품 와인을 블라인드로 시음해 점수를 매기는 예선을 치르고, 본선에서는 셀럽과 전문가 심사위원을 초청해 함께 시음합니다. 올해는 수입사 8곳이 와인 50종을 냈고, 예선을 통과한 레드 8종과 화이트 8종이 본선에서 맞붙었습니다. 최종 선정은 화이트 1위와 레드 1위, 단 2종뿐입니다. 경민석 칩 바이어는 “이미 있는 와인을 마케팅으로 띄우는 것도 좋지만, 아예 처음 선보이는 와인을 확실하게 집중해서 소개하면 고객들이 훨씬 더 관심을 갖는다”고 말합니다.

 

2026 더 블라인드 수상 와인.

 

 

 

 

올해 레드 1위는 나라셀라가 출품한 포스 앤 그레이스 파소 로블스 카베르네 소비뇽 2023(Force & Grace Paso Robles Cabernet Sauvignon 2023), 화이트 1위는 금양인터내셔날이 출품한 독일 셀바흐 리슬링 카비넷 파인허브 트래디션 2024(J. & H. Selbach Riesling Kabinett Feinherb Tradition 2024)였습니다. 셀바흐 리슬링은 추석 세트로 출시돼 1차 물량이 완판됐습니다. “명절 기간에 팔 게 없어서 빠르게 2차 물량을 받아 예약 판매로 대응했을 정도로 인기가 아주 좋았어요.” 1·2회 수상 와인도 누적 2만병이 모두 팔려나갔습니다.

 

독일 셀바흐 리슬링 카비넷 파인허브 트래디션.  홈페이지

판매 방식도 새로운 시도였습니다. 백화점 와인 매장은 보통 수입사가 운영하는 임대 구조인데, 더 블라인드 수상 와인은 백화점이 전량 직매입해서 직접 팝니다. 그만큼 바이어가 책임지고 고른 와인이라는 뜻입니다.

 

그가 꼽는 요즘 와인 시장의 화두는 ‘세분화’입니다. “와인 시장이 예전부터 양극화돼 왔는데, 이제는 양극화된 시장 안에서도 취향이 갈리면서 점점 더 잘게 쪼개지고 있어요. 거기에 맞춰 대응하려고 매일 고민합니다.” 소비자도 달라졌습니다. 유명 브랜드만 좇기보다 자신만의 확실한 취향을 찾고, 희소성이 있거나 ‘산지 대비 탁월한 품질’을 갖춘 와인에 지갑을 엽니다.

 

경민석 칩 바이어 2016년 CMS(Court of Master Sommeliers) 어드밴스드 합격. 

그래서 상품을 고를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새로운 발견의 즐거움”입니다. 철저한 품질 검증은 기본이고, 다른 채널에서는 쉽게 만날 수 없는 단독 상품과 차별화된 포트폴리오를 중요하게 봅니다. 프리미엄 와인이라면 ‘헤리티지를 갖춘 생산자, 뛰어난 밸런스, 가격 이상의 가치’를 모두 갖춰야 자신 있게 내놓습니다. 개인 취향은 ‘편안한 와인’입니다. 그는 “아무리 유명 평론가에게 높은 점수를 받았어도 마시기 부담스럽고 잔을 비우기 힘든 와인에는 손이 잘 안 간다”며 “바이어로서 가장 중요하게 보는 기준은 음용성(Drinkability)”이라고 강조합니다. 와인을 조금 마셔봤는데 재미가 떨어졌다는 이들에게는 ‘테마 시음’을 권합니다. “같은 품종을 정해서 여러 지역 와인을 모아 보거나, 프랑스처럼 한 지역을 정해 다양한 품종을 마셔보세요. 지인들과 각자 한 병씩 들고 모이면 경험도 넓어지고 취향도 훨씬 또렷해집니다.”

 

필립 토그니 나파밸리 카베르네 소비뇽 2019. 최현태 기자

◆나파의 스승, 필립 토그니

 

경민석 칩 바이어에게 아끼는 와인을 묻자 망설임 없이 필립 토그니(Philip Togni)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그는 필립 토그니를 “나파 와인인데 나파 같지 않은 매력이 있는 생산자”라고 소개합니다.

 

필립 토그니의 인생은 와인보다 석유로 먼저 시작했습니다. 1954년 석유회사 셸(Shell)에 들어가 남미에서 유전을 찾던 그는 회사 팸플릿에 적힌 ‘정년 55세’라는 문구를 보고 미래가 없다고 판단해 사표를 냈습니다. 그리고 향한 곳이 프랑스 보르도였습니다. 보르도대학교에서 현대 양조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에밀 페노(Émile Peynaud)의 가르침을 받았고, 갓 생긴 국가 양조학 디플로마의 첫 졸업생 다섯 명 가운데 한 명이 됐습니다.

 

Philip, Birgitta and Lisa Togni. 홈페이지

1956년에는 마고의 샤토 라스콤브(Château Lascombes)에서 알렉시스 리쉰(Alexis Lichine) 밑에서 부책임자로 일했습니다. 이곳에서 미국 기자를 위해 연 1896년 빈티지 와인을 맛보고 “계시와도 같았다”고 회고할 만큼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칠레에서 1년 동안 와인을 만든 뒤에는 캘리포니아의 구인 광고를 보고 마야카마스(Mayacamas)로 건너갔고, 이후 갤로(Gallo), 잉글눅(Inglenook), 샬론(Chalone), 퀴베종(Cuvaison)을 거쳤습니다. 프리처드 힐의 샤펠레(Chappellet) 설립을 도와 빚은 1969년 카베르네 소비뇽은 훗날 100점을 받으며 전설이 됐습니다. 경민석 칩 바이어는 “나파 초창기 멤버로, 지금 나파의 유명 생산자들에게 스승 같은 존재”라고 설명합니다.

 

필립 토그니 포도밭. 홈페이지

1975년 그는 아내 비르기타(Birgitta)와 함께 스프링 마운틴(Spring Mountain) 꼭대기의 땅 약 10ha를 샀습니다. 길이 워낙 험해 부동산 중개인이 약도와 나침반을 쥐여줬다는 일화가 남아 있습니다. 1880년대에 이미 포도밭이었던 땅입니다. 1981년 포도나무를 심었고 1983년 첫 빈티지를 내놨습니다. 포도밭은 모두 해발 약 610m 고지대에 있고, 부지의 절반가량은 숲으로 남겨뒀습니다. 2020년에는 대형 산불 ‘글래스 파이어’가 숲을 할퀴고 지나가 연기 피해 때문에 그해 와인을 아예 만들지 않았습니다.

 

양조 철학은 단순합니다. “나는 단순하게 하는 걸 굳게 믿는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고, “궁극의 시험대는 현미경이 아니라 와인 잔”이라는 말도 남겼습니다. 과학은 길잡이로만 쓰고 결정은 경험으로 하는 ‘맹목적이지 않은 경험주의’입니다.

 

필립 토그니 포도밭. 홈페이지

포도는 사지도 팔지도 않고 자기 밭 포도로만 와인을 만듭니다. 유기농으로 재배하고, 언덕을 파고 지은 양조장에서 중력으로 와인을 옮깁니다. 테이스팅룸도 없습니다. 연간 생산량은 약 2만4000병에 불과하고, 대부분 메일링 리스트 고객에게 먼저 배정(allocation)됩니다. 지금은 프랑스와 호주에서 경험을 쌓은 딸 리사 토그니(Lisa Togni)가 양조를 이끌고, 90대의 필립 토그니도 여전히 와이너리 일에 관여합니다.

 

경민석 칩 바이어가 이 와인에 빠진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요즘 흔한 과숙하고 달콤한 나파 와인과 달리 보르도 전통의 우아함, 나파 특유의 풍부한 과실미, 긴 숙성 잠재력을 한 몸에 지녔어요. 고지대 포도라 완숙도가 충분하면서도 산도가 받쳐줘 무겁지 않고 섬세합니다.” 그는 “미국에 가도 숍에서는 구할 수 없을 만큼 귀한 와인이라 한국에 들어온다는 걸 알고 놀랐다”며 웃습니다.

 

필립 토그니 셀러. 홈페이지

2019 빈티지는 해가 조금 더 따뜻해 과실미가 한층 풍부합니다. 직전 2018 빈티지가 “그냥 보르도 와인”이었다면, 2019는 우아함에 과실의 매력까지 더했습니다. 그는 이 와인을 마실 때마다 보르도 우안 생테밀리옹(Saint-Émilion)의 최정상으로 꼽히는 샤토 슈발 블랑(Château Cheval Blanc)이 떠오른다고 말합니다. 슈발 블랑은 카베르네 프랑 비중이 높은 블렌딩으로 우아함의 대명사가 됐습니다. 실제로 필립 토그니를 사 가는 고객 중에는 보르도 5대 샤토를 즐겨 마시던 이들이 많고, 한번 마셔본 고객은 다시 찾아옵니다. 그는 “5대 샤토는 늘 일정한 품질을 보여줘 오히려 가성비 있다고 여기는 우수 고객도 많지만, 그런 와인과 비교해도 퍼포먼스가 훨씬 좋다”며 “무엇보다 오래 기다리지 않고 지금 마셔도 맛있다”고 말합니다.

 

추천하는 순간은 분명합니다. 비즈니스 미팅이나 특별한 모임처럼 그날 식사 자리의 주인공이 되고 싶을 때,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모일 때, 그리고 나에게 온전한 여유를 선물하고 싶을 때입니다. 그는 “바이어로서는 솔직히 나만 알고 혼자 숨겨두고 마시고 싶은 와인”이라고 털어놓습니다.

 

▶필립 토그니 카베르네 소비뇽 2019(Philip Togni Cabernet

 

Sauvignon 2019) 금양인터내셔날 수입

 

블랙커런트와 블랙베리, 블랙체리의 짙은 과실에 삼나무, 시가 박스, 월계수 잎, 그래파이트 향이 차례로 피어납니다. 보르도 그랑 크뤼에 견줘도 밀리지 않는 탄탄한 구조감과 세련된 타닌이 돋보이고, 오픈 후 2시간쯤 지나면 화려한 꽃향이 잔을 채우며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줍니다.

 

카베르네 소비뇽치고 섬세한 와인이라 경민석 칩 바이어는 안심 부위를 소금만 뿌려 숯불에 구운 요리를 첫손에 꼽습니다. 고기를 구울 때 나온 육즙을 졸인 소스 비프 주(jus)를 곁들이면 더 좋습니다. 올리브와 후추를 듬뿍 뿌린 육회나 비프 타르타르, 화이트 트러플을 얹은 리소토도 잘 어울립니다. 무거운 고기 요리에만 갇히지 않아 일반 카베르네 소비뇽보다 페어링의 폭이 훨씬 넓습니다.

 

스프링 마운틴 해발 약 610m 고지대 자가 포도밭에서 유기농으로 재배한 카베르네 소비뇽을 중심으로 메를로, 카베르네 프랑, 프티 베르도를 함께 발효합니다. 프렌치 오크 배럴(새 오크 40%)에서 20개월 숙성합니다. 2019 빈티지는 와인 스펙테이터 96점, 와인 애드버킷 95+점을 받았습니다.

 

최현태 기자는 국제공인와인전문가 과정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레벨3 Advanced, 프랑스와인전문가 과정 FWS(French Wine Scholar), 부르고뉴와인 마스터 프로그램, 뉴질랜드와인전문가 과정, 캘리포니아와인전문가 과정 캡스톤(Capstone) 레벨1&2를 취득한 와인전문가입니다. 2018년부터 매년 유럽에서 열리는 세계최대와인경진대회 CMB(Concours Mondial De Bruxelles) 심사위원, 2017년부터 국제와인기구(OIV) 공인 아시아 유일 와인경진대회 아시아와인트로피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소펙사 코리아 한국소믈리에대회 심사위원도 역임했습니다. 독일 ProWein, 이탈리아 Vinitaly 등 다양한 와인 엑스포를 취재하며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미국, 호주, 독일, 체코, 스위스, 조지아, 아르메니아, 중국 등 다양한 국가의 와이너리 투어 경험을 토대로 독자에게 알찬 와인 정보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