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반 빅토르(63) 전 헝가리 총리가 차기 유엔 사무총장 후보로 거론되는 가운데 그 후임 헝가리 총리가 ‘유엔을 범죄 조직으로 만들 의도인가’라는 냉소적 반응을 보여 눈길을 끈다. 지난 5월 오르반이 총리를 그만둔 뒤 현재 헝가리에선 오르반 정권 16년을 겨냥한 ‘적폐청산’ 작업이 한창이다.
31일 헝가리 현지 매체 등에 따르면 머저르 페테르(45) 신임 헝가리 총리는 지난 29일(현지시간) 이웃 나라 체코 방문을 계기로 기자회견을 가졌다. 머저르는 ‘오르반이 유력한 차기 유엔 사무총장 후보’라는 외신 보도에 대한 논평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유엔은 현재 많은 문제점과 한계를 안고 있고, 이는 유럽연합(EU)을 비롯한 다른 국제기구들도 마찬가지”라는 말로 운을 뗐다.
이어 “그러나 아무도 그것들(유엔·EU)을 없애려 하진 않을 것”이라며 “만약 누군가 유엔을 없애고 파괴하길 원한다면 오르반에게 (유엔을) 맡기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오르반의 유엔 인수는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비웃었다. 머저르는 오르반 정권 시절 장관을 지낸 인사 3명이 부패 혐의로 구금된 점을 거론하며 “마피아 보스가 유엔을 이끌어선 안 된다”고 단언했다.
오르반을 ‘마피아 두목’에 비유하며 그가 사무총장이 된다면 유엔은 범죄 조직으로 전락할 것이란 견해를 명확히 한 셈이다.
피데스당(Fidesz·청년민주동맹) 대표인 오르반은 지난 2010년 총선에서 피데스가 압승하며 정권을 잡은 이래 올해 5월까지 16년간 장기 집권했다. 이 기간 헝가리는 언론 및 표현의 자유가 위축되고 사법부 독립성도 훼손돼 EU로부터 ‘민주주의 국가로 보기 어렵다’는 경고를 들었다. 오르반을 사실상 권위주의 독재자로 간주한 EU는 헝가리에 대한 재정 지원을 끊는 극약 처방까지 내렸다.
오르반 정부의 외교 정책도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EU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이면서도 러시아 및 중국과 밀착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러시아를 겨냥한 EU의 경제 제재에 동참하지 않은 것은 물론 다른 나토 동맹국들과 달리 우크라이나에 무기 등 군사 원조를 제공하는 것조차 거부했다.
올해 4월 총선에서 헝가리 국민은 오르반 정권을 심판했다. 야당인 티서당(Tisza·존중과자유)에 표를 몰아준 것이다. 티서당 대표인 머저르는 5월 총리에 취임한 뒤 오르반 정권의 잔재 청산을 밀어붙이고 있다. 피데스당 당사는 정치자금 회계 부정 혐의로 압수수색을 당했고, 언제 검찰의 칼날이 오르반을 직접 겨눌지 모르는 상황이다.
이런 오르반을 차기 유엔 사무총장으로 옹립하려는 국제사회의 움직임 뒤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있다. 오르반은 트럼프와 개인적으로 절친하다. 트럼프 지지층인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세력 내부에는 오르반을 높이 평가하는 이들이 많다.
여기에 오르반이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중국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과도 가까운 점을 감안할 때 미·중·러 3국이 힘을 합치면 오르반을 유엔 사무총장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 트럼프의 계산인 듯하다.
하지만 미·중·러와 마찬가지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인 영국·프랑스의 반대가 극심해 성사 여부는 불투명하다. 안보리 5대 상임이사국 중 한 나라만 거부권을 행사해도 누구든 유엔 사무총장이 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