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에 ‘신뢰 회복’ 과제 남긴 최불암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1989년 10월12일 MBC 드라마 ‘수사반장’이 880회를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박정희정부 시절인 1971년 2월8일 시작했으니 무려 18년 8개월 만이다. 중간에 6개월여 방영이 안 된 점을 감안해도 한국 방송사에 길이 남을 대장정이라고 하겠다. 1980년대 들어 경제 규모가 커지고 그에 따라 빈부의 격차 등 양극화도 심화하면서 남의 재산 심지어 생명을 노린 범죄 또한 증가했다. 그래서일까, 주인공 박영한 반장(최불암)은 마지막회에서 “빌딩이 높을수록 그림자는 길어진다”는 대사를 남겼다. 종영 후 꼭 1년 뒤인 1990년 10월13일 당시 노태우정부에 의한 ‘범죄와의 전쟁’ 선포를 예견한 듯한 발언이다.

배우 최불암(1939∼2026)이 2024년 경찰청에 의해 명예 국가수사본부장(치안정감)으로 위촉된 뒤 경찰관 정복 차림으로 인사말을 하고 있다. 경찰청 제공

수사반장의 교훈은 한마디로 ‘권선징악’이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반드시 경찰에 붙잡혀 죗값을 치렀다. 범인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혹은 어머니의 간곡한 설득에 못 이겨, 끝내 경찰서를 찾아가 자수하는 내용의 에피소드도 많았다. 어느 쪽이든 시청자들에게 ‘죄 짓고선 못 산다’라는 교훈을 주기에 충분했다. 각종 드라마와 영화에서 감초 같은 조연 연기를 펼친 배우 이계인(74)은 젊은 시절 수사반장의 범인 배역을 도맡아 안방 극장에 얼굴을 알렸다. 이 같은 인연 때문인지 이계인은 MBC가 2024년 방영한 프리퀄 드라마 ‘수사반장 1958’에 회개한 옛 범죄자 역할로 특별 출연하기도 했다.

 

수사반장의 등장 인물들은 위로 경찰서장 역 전운(2005년 별세)부터 반장 역 최불암, 형사 역 김상순(2015년 〃) , 조경환(2012년 〃), 남성훈(2002년 〃) 등 하나같이 남자답고 듬직했다. 오직 범죄자를 검거해 피해자의 눈물을 닦아주고 사회 정의를 실현한다는 일념으로 똘똘 뭉친 모범적인 공직자상(像)에 가까웠다. 일선 경찰관들이 이 드라마를 좋아한 것은 당연했다. 미혼 경찰관들 사이에 “수사반장 덕분에 결혼했다”는 농담이 나돌았다. 드라마 방영 초기인 1972년 진작 명예 경감으로 위촉된 최불암은 2024년 명예 국가수사본부장(치안정감)까지 진급했다. 경찰청장(치안총감) 다음으로 높은 계급이다.

김종철 경찰청장 직무대행이 30일 배우 고(故) 최불암의 빈소를 찾아 조문한 뒤 소감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방송 화면 캡처

지난 29일 87세를 일기로 별세한 최불암을 향한 경찰의 추모 열기가 뜨겁다. 30일 빈소를 찾은 김종철 경찰청장 직무대행은 “고인의 뜻을 잘 받들어 국민에게 신뢰받는 경찰이 되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마침 경찰이 연루된 각종 비리 사건 등으로 경찰을 보는 시민들의 눈초리가 그 어느 때보다 따가운 시점이다. 생전에 배우를 ‘광대’라고 부른 최불암은 후배 연기자들한테 “국민이 가야 할 길 위에 가시덤불이 있으면 그걸 치우는 게 광대 정신”이라고 강조했다. 광대 정신을 ‘경찰 정신’으로 바꿔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14만 경찰 조직원들에게 ‘국민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는 과제를 남긴 채 최불암은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