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앞에 선 CIA 요원의 ‘마지막 여행’

‘와일드 호스 나인’ 4일 개봉
존 말코비치 노년 연기 눈길

암 말기인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 크리스(존 말코비치)는 오랜 동료 리(샘 록웰)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부탁한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천국에 가지 못할까 두렵다는 이유다. 수십 년간 암살과 정권 전복 공작에 관여해온 남자가 정작 자신의 죽음 앞에서는 신의 심판을 걱정한다. 우스꽝스러운 부탁이지만, 그 안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지나온 삶에 대한 회한이 뒤섞여 있다.

 

4일 개봉하는 마틴 맥도나 감독의 신작 ‘와일드 호스 나인’(포스터)은 죽음을 앞둔 노년의 CIA 요원이 마지막 여행에서 겪는 변화를 그린 블랙코미디다. 배경은 군사 쿠데타를 앞둔 1973년 칠레. 사회주의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를 무너뜨리기 위한 공작에 가담한 크리스는 리와 함께 이스터섬으로 향한다. 평생 보고 싶었던 거대한 모아이 석상을 보기 위해서다. 하지만 병세는 악화하고 기억력마저 점차 흐려지고 있다.

크리스는 과거 자신이 관여한 비밀공작을 성공과 실패로 구분하며 태연하게 이야기한다. 냉전 시대 미국의 대외 개입을 향한 풍자가 곳곳에 배어 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자신이 저지른 일을 의심하고 후회하기 시작했다는 고백은 그 태연함에 균열을 낸다. 예전에는 거리낌 없이 죽이던 나방을 이제는 조심스레 밖으로 내보내고, 비가 내리면 날개가 젖을까 걱정한다. 이스터섬을 떠도는 야생마들에게도 애정을 느낀다. 과거를 돌아보며 생겨난 회한과 오랜 세월 몸에 밴 냉소가 한 인물 안에 공존한다.

 

크리스의 마지막 여행도 뜻대로 흘러가지만은 않는다. 리에게 자신의 죽음을 부탁해놓고도 기억이 흐려지면서 그 약속마저 잊는다. CIA는 과거의 비밀을 회고록에 남기려는 그를 위험인물로 여기고, 리는 친구의 부탁과 조직의 명령 사이에서 갈등한다. 죽음을 둘러싼 긴장은 총격전보다 두 남자가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서서히 쌓인다.

 

감독은 이처럼 무거운 상황에서도 두 남자를 좀처럼 진지하게 대화시키지 않는다. 공룡에게도 영혼이 있는지, 미국 치즈는 왜 형편없는지 따위를 두고 끊임없이 티격태격한다. ‘킬러들의 도시’와 ‘이니셰린의 밴시’에서 선보였던, 독설과 농담 속에 복잡한 감정을 숨기는 남자들의 관계가 이번에도 펼쳐진다. 때로는 끝없이 이어지는 수다가 이야기의 흐름을 늘어뜨리지만, 말다툼 사이로 오랜 우정과 이별을 앞둔 슬픔이 드러난다.

 

영화의 중심을 잡는 것은 존 말코비치의 연기다. 특유의 느릿하고 냉소적인 말투로 크리스의 뻔뻔함을 드러내면서도, 문득 말을 잃거나 기억을 더듬는 순간에는 노년의 불안과 외로움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샘 록웰 역시 짜증 섞인 반박과 무심한 표정으로 크리스의 수다를 받아내며 두 사람의 오랜 관계에 설득력을 더한다. 말코비치는 이 작품으로 올해 베네치아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