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후 나비에(신민아)의 손 위에 커다란 새 한 마리가 내려앉는다. 그 정체는 새의 모습으로 변한 서왕국 왕자 하인리(이종석). 황제와 황후가 등장하는 궁중극이지만 무대는 조선이 아닌 서양풍 제국이다. 한국 배우들이 유럽의 고성을 배경으로 낯선 이름을 부르며 사랑과 권력을 다툰다. 웹소설과 웹툰에서 인기를 끈 ‘로맨스 판타지’(로판)의 세계를 실사 드라마로 옮긴 것이다. 전 세계 누적 조회수 30억회에 육박하는 ‘재혼 황후’가 3일 디즈니+에서 공개됐다. 한국 드라마에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서양풍 로판의 실사화로, 새로운 장르의 시장성을 가늠할 시험대다.
◆30억뷰 로판, 서양 황실 그대로 실사화
‘재혼 황후’는 동대제국의 황후 나비에가 도망 노예 출신 라스타(이세영)에게 마음을 빼앗긴 황제 소비에슈(주지훈)로부터 이혼을 통보받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나비에는 이혼을 받아들이는 대신 하인리와의 재혼 승인을 요구한다. 네 남녀의 사랑과 배신, 질투에 황실의 권력 다툼이 얽힌다.
◆‘하렘의 남자들’도 제작… K로판 시장성 주목
‘재혼 황후’에 관심이 쏠리는 것은 한 편의 인기 웹툰을 영상화했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웹소설·웹툰에서 이미 인기를 입증한 로판이 K드라마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는 본격적인 시도이기 때문이다.
한국 드라마는 이미 웹소설과 웹툰의 판타지 설정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왔다. ‘재벌집 막내아들’과 ‘내 남편과 결혼해줘’ 등은 과거로 돌아가 삶을 다시 사는 회귀라는 비현실적인 설정을 현대 한국 사회와 결합해 흥행했다. 반면 ‘재혼 황후’는 가상의 서양 제국과 황실이라는 세계관 자체를 영상으로 구현했다. 원작의 사건과 인물뿐 아니라 장르 특유의 공간과 분위기까지 옮겼다는 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시도다.
후속 작품도 준비되고 있다. 스튜디오드래곤은 같은 알파타르트 작가의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 ‘하렘의 남자들’을 제작 중이다. 수지가 제국의 여황제 라틸을 연기하고 ‘도깨비’, ‘미스터 션샤인’의 이응복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여황제가 황권을 지키기 위해 여러 남자 후궁을 들이면서 벌어지는 궁중 로맨스 판타지로, 내년 공개를 목표로 하고 있다. ‘재혼 황후’와 마찬가지로 황실 여성을 중심으로 사랑과 정치적 갈등을 풀어낸다.
로판의 영상화가 본격화하는 배경에는 이미 세계적인 독자층을 확보한 웹소설·웹툰 지식재산권(IP)이 있다.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입장에서는 기존 팬덤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청자층을 확보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서양풍 판타지라는 배경도 해외 시청자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요소가 될 수 있다. 특정 국가의 역사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도 가상의 황실을 둘러싼 이야기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로판 IP의 영상화는 실사 드라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네이버웹툰은 지난달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사 하야테, 글로벌 애니메이션 플랫폼 크런치롤과 협력해 웹툰의 애니메이션화를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재혼 황후’도 제작 대상에 포함됐다. 일본 제작사 트로이카가 제작하는 TV 애니메이션은 2027년 공개될 예정이다. 한국 웹소설에서 출발한 이야기가 웹툰을 거쳐 한국 드라마와 일본 애니메이션으로 각각 제작되는 것이다.
다만 원작의 높은 인기가 드라마 흥행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웹툰 독자와 드라마 시청자는 소비 방식부터 다르다. 특히 로판은 현실을 배경으로 한 로맨스 드라마와 달리 궁전과 의상, 판타지 장면을 구현하는 데 상당한 제작비가 들어간다. 기존 팬덤을 넘어 안정적인 시청자층을 확보해야 후속 작품 제작도 탄력을 받을 수 있다.
3일 서울 여의도 콘래드 서울에서 열린 제작발표회에서 조수원 감독은 “인물들이 움직이는 공간이 진짜처럼 느껴지도록 미술과 VFX에 공을 들였다”며 “원작에 최대한 충실하려 했다”고 밝혔다. 주지훈은 “가상의 세계관이지만 사극의 익숙한 관계성을 바탕으로 어투를 다듬어 시청자들의 몰입감을 높이려 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