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치권에서 헌법 개정과 방위력 강화 움직임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에 맞서 평화헌법을 지키려는 시민사회의 활동도 확산하고 있다.
전쟁과 무력행사의 영구 포기를 규정한 헌법 9조의 내용을 새긴 기념비는 헌법 공포 80주년인 3일 전국 100곳을 넘어섰다.
3일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평화헌법의 가치를 알리기 위해 세워진 ‘헌법 9조의 비’는 지난달 말 기준 전국 95곳에 설치돼 있었다. 이날 6곳에 추가로 세워지면서 전체 설치 장소는 101곳으로 늘었다.
헌법 9조는 일본이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행사를 영구히 포기하고, 육·해·공군을 비롯한 전력을 보유하지 않으며, 국가의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태평양전쟁 패전 이후 제정된 일본 평화헌법의 핵심 조항으로, 전쟁을 국가 정책의 수단으로 삼지 않겠다는 전후 일본의 평화주의를 상징한다. 그러나 일본 우익 세력을 중심으로 개헌 주장이 꾸준히 제기돼 왔으며, 최근에는 방위력 강화와 맞물려 헌법 개정 논의가 다시 힘을 얻고 있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도 개헌 추진에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 4월 자민당 전당대회에서 내년 2월 전당대회를 개헌 발의 일정 구체화의 목표 시점으로 제시하며 개헌 의지를 드러냈다.
‘헌법 9조의 비’는 이 같은 정치권의 움직임에 맞서 시민들이 호헌, 즉 헌법을 지키자는 뜻을 알리기 위해 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첫 비석은 1985년 오키나와현 나하시에서 세워졌으며, 6년 뒤 히로시마에도 설치되면서 다른 지역으로 확산했다. 이후 매년 1~2개씩 새로 건립됐다.
비석 설치가 눈에 띄게 늘어난 계기는 2022년이었다. 당시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우크라이나는 내일의 동아시아일지도 모른다”고 발언하면서 동아시아 안보 상황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
같은 해 말 기시다 정권이 3대 안보 문서를 개정해 적 기지 공격 능력을 뜻하는 ‘반격 능력’ 도입의 근거를 마련하자 시민들의 위기감도 높아졌다. 이후 헌법 9조의 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한 비석 건립이 잇따랐으며,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새로 설치된 비석만 44개에 달한다.
헌법 9조의 비 설치 현황을 조사해 온 저널리스트 이토 치히로 씨는 아사히신문에 최근 수년간 비석 건립이 급증했다며, 개헌 추진과 방위력 강화에 위기감을 느낀 시민들이 헌법 9조를 널리 알리기 위해 비석을 세우고 있다고 설명했다.
시민들의 호헌 활동에는 전쟁을 직접 경험한 세대의 기억이 희미해지는 데 대한 우려도 담겨 있다.
지난 8월 고베시 주택가에 헌법 9조의 비를 세우는 데 앞장선 시민 이케미 히로코 씨는 아사히신문에 태평양전쟁 당시 대공습을 경험한 친척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고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그는 전쟁 경험자들이 사라지면서 평화주의의 가치마저 함께 사라질 수 있다는 두려움에 비석 건립에 나섰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