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온실가스 감축의 핵심 재원인 ‘기후대응기금’ 규모를 내년에 3배 가까이 늘렸다며 치적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실상은 타 회계에서 옮겨온 ‘에너지 사업’ 몫을 제외하면 기존 기후대응 사업 예산은 올해보다 오히려 1300억원 넘게 줄어든 것으로 분석됐다. 사업 예산이 전년도보다 감소한 것은 기금 설립 이래 이번이 두 번째다.
4일 세계일보와 녹색전환연구소가 국회 심사 중인 ‘2027년도 기후대응기금 운용계획안’을 입수해 전수분석한 결과 산업통상부의 에너지 및 자원사업 특별회계(에특회계)에서 이관돼 온 사업을 제외한 순수 기후대응기금 지출규모는 2조4594억원으로 올해(2조5920억원)보다 1326억원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에특회계는 에너지 수급과 가격 안정을 위해 설치된 특별회계로 원래 산업통상부 소관이다.
하지만 지난해 정부 조직개편으로 환경부(현 기후에너지환경부)가 에너지 정책 기능을 흡수하면서 내년부터 에특회계 일부 사업이 기후대응기금으로 옮겨오게 됐다. 이에 따라 기후대응기금 총지출 규모는 올해 2조5920억원에서 내년 7조6009억원으로 193.2%(5조89억원) 늘었다.
하지만 기후대응기금이 외형상 7조원대로 불어난 것은 사실상 착시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분석 결과에 따르면 이번에 기후대응기금으로 이관된 에특회계 사업은 37개로, 예산 규모만 5조1415억원에 달했다. 이는 내년도 기후대응기금의 전체 증가액을 웃도는 규모로, 사실상 예산 증액분 전액이 기존 에특회계 사업을 단순 이관한 데 따른 효과인 것으로 드러났다.
실질적으로 기후대응 투자를 늘린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장부상 소속만 바꾼 것을 정부가 대규모 예산 증액의 성과로 내세워서는 안 된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앞서 정부는 지난달 7일 한국형 녹색대전환(K-GX) 정책을 발표하면서 “기후대응기금을 7조6000억원 수준으로 대폭 확대해 K-GX 수입 기반을 확보했다”고 강조한 바 있다.
◆녹색금융·탄소감축 예산 줄줄이 삭감
정작 K-GX와 직결된 기존 기후대응기금 예산은 줄줄이 삭감됐다.
대표적인 사례가 녹색금융 지원을 위한 ‘산업은행 출자’ 사업이다. 해상풍력·수소 인프라·기후테크 등 온실가스 감축 효과가 크지만 민간 투자가 활성화되지 않아 정책금융의 마중물 역할이 필요한 분야를 지원하는 사업이지만, 내년도 예산은 500억원으로 올해(900억원)와 비교해 44.4%(400억원)가량 감소했다.
중소·중견기업의 탄소감축 기술과 설비 도입을 지원하는 ‘탄소중립 설비투자 지원’ 사업도 산업통상부 소관은 19.5%, 중소벤처기업부 소관은 20.8% 각각 감액됐다. 철강 등 4대 고탄소 산업의 탈탄소 핵심기술 개발을 지원하는 ‘탄소중립산업 핵심기술개발’ 사업 역시 K-GX 전략과 직결된 산학연 연구개발(R&D) 사업이지만, 신규 과제가 편성되지 않으면서 예산이 39.2% 삭감됐다. 탈석탄 전환에 따른 정의로운 전환 지원 사업도 5.3% 줄었다.
주요 감액 사유는 ‘새로 지원할 세부 과제를 찾지 못해서’, ‘집행률이 부진해서’, ‘정부가 부담하는 사업비 비중을 단계적으로 줄이기 위해서’였다.
일례로 ‘산업은행 출자’ 사업은 정부의 재정 분담 비중을 단계적으로 줄이는 대신 산업은행의 자체 자금 지원을 확대하겠다는 취지로 예산이 삭감됐다. 그러나 정작 산업은행 자체 자금도 올해 1300억원에서 내년 750억원으로 줄면서 전체 프로그램 규모는 2200억원에서 1250억원으로 쪼그라든 것으로 분석됐다.
조원영 녹색전환연구소 연구원은 “기존 기금·회계의 재배치, 재정 주머니 옮기기의 결과에 불과한데 기후재정이 대폭 증가했다고 해석할 수 없다”며 “오히려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NDC) 및 정부가 야심차게 발표한 K-GX와 밀접하게 연관된 핵심 사업의 예산들이 정부안에서 대거 감액됐다”고 지적했다.
기존 기후대응기금 사업들이 줄줄이 삭감될 때 산업부 에특회계는 5800억원가량 몸집을 불려 기금에 편입됐다.
문제는 이 가운데 온실가스 감축과 직접적인 관련이 적은 에너지 복지성 사업이 다수 포함됐다는 점이다.
기초생활수급가구 등에 액화석유가스(LPG)·도시가스·연탄 등 에너지 구입비를 지원하는 ‘에너지바우처’ 사업 4951억원과 국가유공자 등의 보철용 LPG 차량의 연료 개별소비세 인상분을 지원하는 ‘유공자등차량지원’ 사업 74억원 등이 대표적이다. 취약계층과 국가유공자 지원이라는 점에서 필요한 사업이지만, 화석연료 소비를 부추기는 사업에 기후대응기금을 투입하는 것은 취지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2022년 처음 설치된 기후대응기금은 ‘탈탄소’ 사회로의 전환을 뒷받침하기 위한 재원이다.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은 기금의 설치 목적을 ‘탄소중립 사회로의 이행과 녹색성장의 추진을 위한 재원 확보’로 명시하고 있다.
세금도둑잡아라 대표인 하승수 변호사는 “사업 규모 등을 고려하면 사실상 기후대응기금이 에특회계에 잠식돼 장기적으로 기금의 설립 취지가 희석되거나 실종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고 짚었다.
한편으론 에특회계에서 이관된 사업이라도 온실가스 감축 효과가 뚜렷하다면 예산을 더 적극적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감축과 직접적인 관련이 적은 사업은 다른 회계로 옮기고, 확보한 재원을 실질적인 감축 사업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무공해차 충전 인프라 확충 사업이다. 충전시설 부족이 무공해차 보급의 주요 걸림돌로 꼽히는데도 해당 사업 예산은 올해보다 28.7%(2669억원) 삭감됐다. 반면 정부는 무공해차 보급 사업 자체에는 올해보다 31.7% 늘어난 3조89억원을 편성했다. 차량 보급 예산은 대폭 늘리면서 정작 보급 확대에 필수적인 충전 인프라 예산은 줄여 사업 간 엇박자가 발생했다는 지적이다.
◆에특회계 이관에 재정 악화 우려
에특회계 사업의 대규모 이관으로 기후대응기금의 재정 수지가 악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실제로 내년도 기후대응기금 재정운영표에 따르면 당기순손익은 2025년 3306억원, 2026년 1836억원 흑자에서 내년에는 4조1317억원의 순손실로 돌아설 전망이다. 대규모 지출이 필요한 에특회계 사업들이 기후대응기금으로 대거 넘어온 반면, 공공자금관리기금 예수금 등 주요 재원은 산업통상부의 자원안보기금 신설 과정에서 분리되면서 수입과 지출 간 불균형이 커진 데 따른 것이다.
기금의 주요 재원인 온실가스 배출권 유상할당 수입도 여전히 목표치를 크게 밑돌고 있다. 기후대응기금은 정부가 기업에 온실가스 배출권을 유상으로 판매해 거둬들인 수입을 주요 재원으로 삼고 있다.
정부는 올해 배출권 유상할당 수입으로 7651억원을 예상했지만, 실제 걷힌 금액은 2040억원에 그쳤다. 수납률이 26.7%에 불과한 것이다. 수납률은 2024년 92.9%에서 2025년 54.6%, 2026년 26.7%로 급격히 떨어졌다. 그럼에도 정부는 내년도 유상할당 수입을 올해 계획액보다 15.2% 늘어난 8814억원으로 잡아 재원 확보의 실현 가능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홍종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기후대응기금의 설립 취지에 맞게 재원을 확보하려면 배출권거래제의 실효성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며 “배출권 유상할당 비율을 높여 실질적인 수입을 확대하는 것이 기후대응기금의 재원을 확충하는 길”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