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호섭의전쟁이야기] 러일전쟁, 1905년은 누구의 역사인가

얼마 전 러일전쟁 칼럼을 썼다. 이에 평소 내 칼럼을 읽는 한 독자가 아쉬움을 전해왔다. 러일전쟁이 을사늑약과 함께 우리가 식민지로 전락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그 이야기가 부족했다는 것이다. 맞는 지적이었다. 이번 칼럼은 그 독자에게 보내는 답장이다.

러일전쟁의 중심에는 한반도가 있었다. 일본과 러시아는 한국과 만주의 권익을 놓고 흥정했다. 이른바 ‘한만교환론’이다. 일본은 한국에서의 우월한 지위를 인정받는 대신 만주에서 러시아의 이익을 인정하려 했다. 러시아는 만주의 권익을 지키면서 한국에서 일본의 군사 활동을 제한하려 했다. 1903년에는 북위 39도선 이북을 중립지대로 만들자는 제안까지 내놓았다. 정작 대한제국은 협상 테이블에 없었다.

서울로 진입하는 일본군(미 코넬대 도서관 소장)

협상이 결렬되자 일본은 전쟁을 택했다. 1904년 2월 뤼순 기습과 동시에 일본군은 인천에 상륙해 서울로 들어왔다. 인천 앞바다에서는 러시아 군함 두 척이 일본 함대에 패했다. 전쟁은 한반도에서도 시작된 것이다.



대한제국의 중립 선언은 소용없었다.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강요해 한반도를 군사적으로 이용했다. 일본군은 압록강으로 진격했고 경의선을 군용철도로 건설했다. 땅이 수용되고 한국인들이 전쟁에 동원됐다.

독도도 예외가 아니었다. 1905년 2월 일본은 러시아 함대 감시에 유리한 독도의 군사적 가치에 주목하고 자신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전쟁 막바지인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 밀약에서 미국 측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사실상 용인했다. 8월에는 영국이 제2차 영일동맹을 통해 일본의 한국 내 우월한 지위를 인정했고, 9월 포츠머스조약에서 패전국 러시아도 이를 받아들였다. 일본은 러시아로부터 전쟁배상금을 얻지 못했지만, 한국에서는 외교권을 빼앗았다. 11월17일 을사늑약이 강요되자 ‘황성신문’에는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이 실렸고, 민영환은 자결로 항거했다.

일본에 1905년은 열강의 반열에 오른 승리의 해였다. 러시아에는 패배와 혁명의 해였고, 강화를 중재한 미국의 루스벨트는 이듬해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국권 피탈의 해였다.

누구의 경험에 주목하느냐에 따라 보이는 역사는 달라진다. 나는 일본이 어떻게 이겼는지를 물었고, 독자는 그 승리의 대가를 누가 치렀는지를 물었다. 다시 보니 두 질문은 따로 있지 않았다. 일본의 승리 뒤에는 한국의 땅과 노동, 침해된 주권이 있었다. 누가 왜 어떻게 전쟁에서 승리했는지를 밝히는 일도 중요하지만, 승자의 성취만으로 전쟁의 역사가 완성되지는 않는다. 익숙한 자리에서 벗어나 타인의 눈으로 과거를 바라보는 것. 한 독자의 아쉬움이 내게 다시금 일깨워준 역사 공부의 기본이다.

심호섭 육군사관학교 교수·군사사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