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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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초대석] 이재호 출판문화산업진흥원 초대 원장

“책은 ‘모태 콘텐츠’… 출판 부흥 위해 환경 개선 온 힘”
출판업계 불황이 심각하다. 2009년 기준 등록 출판사 3만5000여곳 중 한 해에 1종이라도 책을 내는 출판사는 10%도 안 된다는 통계가 있다. 출판계 ‘모세혈관’에 해당하는 서점은 1999년 4600여곳에서 2011년 말 기준 1750여곳으로 줄었다. 35년 역사를 자랑하는 책도매상 ‘학원서적’마저 경영난 끝에 최근 폐업했다. 지난 7월27일 출판산업 부흥의 사명을 띠고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출범했다. 기존 간행물윤리위원회를 확대·개편한 출판진흥원은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특수법인이다. 신생 기관의 첫 수장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맡은 이재호(58) 원장을 21일 서울 강서구 방화동 국립국어원 4층 집무실에서 만났다. 진흥원은 별도 청사가 없어 국어원 건물에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다.

―원장이 된 소감은.

“솔직히 마음이 무겁다. 어려우리라 짐작은 했지만 이 정도인 줄 몰랐다. 연간 10여종 이상의 책을 꾸준히 내는 출판사가 900여곳에 불과하다. 정말 어려운 때에 어려운 자리를 맡게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진흥원장으로서 가장 주력하고 싶은 점은.

“역시 ‘모태(母胎)’ 콘텐츠로서 책의 위상을 회복하고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받도록 하는 일이다. 책이라는 모태에서 드라마·영화·뮤지컬·애니메이션·게임 등 모든 콘텐츠가 나온다. 최근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TV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이나 ‘성균관 스캔들’도 출발점은 책이었다. 책은 이야기의 보고이자 상상력과 창의력의 발전소다. 그런데 책과 출판이 그에 걸맞은 대접을 받고 있느냐 하면, 솔직히 회의적이다. 출판이 제대로 대접받도록 국민의 인식과 환경을 바꾸는 일에 온 힘을 쏟고 싶다.”

이재호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은 “출판이 무너지면 우리나라 지식과 문화의 기반이 무너진다. 육체는 있으나 영혼이 없는 사람과 같은 존재가 되고 만다”고 말했다
―출판산업이 당면한 가장 큰 어려움은.

“거시적으로 보면 ‘디지털 혁명’에 대한 대처다. 미시적으로 보면 유명무실해진 도서정가제의 보완·정착, 도서정보의 일원화된 집계·활용, 저작권과 관련된 현안들의 원만한 해결, 독서 수요의 창출·확대 등이다. 디지털은 우리가 책을 쓰고 만들고 파는 방식을 모조리 바꿔놓았다. 5000만 국민이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저자가 되고, 편집자가 되고, 판매·유통업자가 될 수 있다. 이건 개별 출판사나 서점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결국 전자출판 육성에 출판계 미래가 걸려 있다는 얘기인가.

“그런 셈이다. 출판물에 대한 심의와 규제도 여전히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진흥, 곧 발전이다. ‘진흥’이 앞으로 나오고 심의와 규제는 뒤로 물러나야 한다. 진흥의 중심에 전자출판이 있다. ‘진흥원’ 간판을 달자마자 ‘우수 전자책 제작 및 유통활성화 사업계획’을 확정하고 지원 대상자 선정에 들어갔다. 전자출판에 진흥원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믿고 이 분야에 정통한 인재도 새로 뽑을 계획이다.”

―그럼에도 출판계는 전자출판에 소극적인 분위기다.

“전자책이냐, 종이책이냐의 문제는 결국 매개체 혹은 미디어의 문제다. 우리 목표는 전자책과 종이책의 관계를 ‘대체재’가 아닌 ‘상호보완재’로 보고, 독자들 선택의 폭이 넓어지도록 두 매체의 동시 발전을 모색하는 데 있다. 과거 전자책 시장의 급격한 신장을 예측한 분석은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출판사들도 전자책 시장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전자책 시장 확대정책을 무조건 밀어붙이기에는 무리가 있다. 속도 조절과 방향 설정에 최대한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저자나 출판사가 저작권보호 차원에서 망설이는 경우도 있다.

“저자와 출판사의 우려를 덜어주기 위해 연말까지 ‘전자출판 불법저작물 추적 차단 및 통계정보 시스템 구축사업’을 완료할 계획이다. 그러나 저작권보호 못지않게 중요한 건 시대 흐름이다. 싸이의 뮤직비디오 ‘강남스타일’을 봐라. 공개했더니 순식간에 세계로 퍼져 6000만건 이상의 조회 수를 기록했다. 우리는 MP3라는 음악파일의 대중화로 유니버설·소니·워너뮤직·EMI·BMG 등 세계 5대 메이저 음반사가 영향력을 잃고 음악시장이 재편되는 것을 지켜봤다. 음반사 대신 대형 포털이나 음원공급사가 음악시장을 지배하면서 음악의 다양성 훼손 등 문제점을 초래했다. 전자출판 시장도 포털이나 새로운 전자책 유통사만 살아남는다면 출판 다양성이 약화되거나 상업적 콘텐츠만 개발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오랜 세월 양질의 콘텐츠를 개발한 전통 출판사가 시장에서 계속 살아남아 콘텐츠 다양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문을 닫는 영세서점들 사정이 절박하다. 지방 중소서점을 살릴 방책은.

“유명무실해진 도서정가제 때문이다. 정가판매와 할인판매가 공존하는 기형적인 이중구조 속에서 온갖 변칙 판매와 할인 경쟁이 난무해, 결국 영세서점과 출판사들만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출판계와 정부, 진흥원이 협의체를 만들어 이 문제를 논의할 것이다.”

―한국문학의 해외진출이 가시적 성과를 보이고 있는데 진흥원의 해외진출 전략은.

“출판 한류의 시대를 열겠다. 신경숙씨의 ‘엄마를 부탁해’가 미국·중국·일본·이스라엘 등 33개국에 저작권을 수출했다.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도 중국 등 7개국에서 출간됐다. 우리의 선진화된 정보기술(IT)에 양질의 콘텐츠를 얹혀 밖으로 내보내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진흥원에도 ‘해외진출팀’을 신설했다.”

―해외진출 업무의 중복성을 피하기 위해 한국문학번역원을 진흥원이 흡수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이미 정부 차원에서 결론이 난 사안을 다시 거론하는 건 적절치 않다. 번역원은 말 그대로 문학에 치중하고, 진흥원은 실용서 같은 일반 간행물 쪽에서 해외진출을 추진한다면 업무 중복성 문제가 해소되지 않을까 한다.”

―출판인들의 자구 노력이 선행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정부 지원은 출판생태계의 의존성만 키운다는 지적도 있다.

“옳은 지적이다. 투명성과 효율성을 제고해 출판계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 최근 동서문화 고정일 대표가 펴낸 ‘한국출판 100년을 찾아서’(정음사)라는 책을 읽고 정말 부끄러웠다. 출판 선각자들의 혜안과 기개, 성실 등을 배웠다. 그 자랑스러운 유산과 전통을 되살려내는 일이 정부에 기대지 않는 한국 출판의 자립·자율·자강의 길이 아닌가 한다.”

―출판계의 중요한 장기 목표로 ‘출판진흥기금’ 조성을 꼽는 출판인이 많다.

“진흥원이 나서기에는 법적·제도적으로 장애가 많다. 출판인들이 전면에 나서야 한다. 영화기금은 규모가 2800여억원에 이르고, 관광진흥개발기금도 7100여억원에 달한다. 영화인과 관광인들이 기금을 조성할 때 출판인도 만사 제쳐놓고 뛰어들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 같다. 전 출판계의 지혜 모으기와 동참이 절실하다.”

―‘낙하산 인사’라며 임명을 반대하는 출판인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 같다.

“출판을 평생의 업으로 살아온 분들에 비하면 출판인으로서 이력은 내놓을 게 못 된다. 그렇다고 문외한은 아니다. 동아일보 출판담당 이사로 3년4개월 동안 200종이 넘는 단행본을 냈다. 그런데도 거두절미하고 ‘낙하산’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더 겸허하고 치열하게 일하라는 채찍질로 알고 달게 받아들이고 있다.”

―끝으로 한국 출판의 미래 비전과 역할에 대해 들려 달라.

“출판은 우리 정체성을 지켜주는 울타리와 같다. 출판은 또 지식정보화 시대에 중요한 미래 성장동력이다. 문화가 국가경쟁력인 시대에 출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나라가 명실상부한 출판 종주국이 되도록 모든 출판인이 마음을 열고 힘을 합쳤으면 한다. 진흥원이 충실한 심부름꾼이 되겠다.”

대담=조정진 문화부장, 정리=김태훈 기자, 사진=이제원 기자 af103@segye.com
이재호 원장은?

▲1954년 광주광역시 출생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동 대학원 정치학 박사 ▲동아일보 워싱턴 특파원·정치부장·논설위원실장·출판편집인 겸 출판국장 ▲미국 조지타운대 공공정책전공 초빙연구원 ▲관훈클럽 총무 ▲국가정보화전략위원회 민간위원 ▲관훈클럽 신영연구기금 이사(현) ▲한국신문협회 출판협의회 부회장(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