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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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상남의 奇人野史]백리해와 부인 두씨

남편의 입신양명 위해 30년을…
“남자가 뜻을 두면 길은 천지사방에 열려 있다고 했사온데 서방님께오선 어찌 출사의 꿈을 접고 구구히 처자식을 지키느라 허송세월을 하고 계시옵니까? 한때의 곤란은 소첩이 기꺼이 이겨낼 것이오니 집안 걱정은 마시고 출사의 길을 찾으소서.”
백리해(百里奚)는 부인 두씨의 말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태어나면서 가난을 업으로 물려받았던 백리해가 나이 서른이 돼서야 맞은 아내다. 하루하루 끼니 걱정에 시름을 덜 날이 없건만 아내는 지금까지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았다. 갓 돌을 넘긴 아들을 등에 업고 날품을 팔면서도 아내는 미소와 희망을 잃지 않았다.
“전쟁이 끊이지 않는 험한 세상인데, 부인 혼자 어떻게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겠다는 것이오?”
“서방님께서 존귀한 자리에 올라 높은 뜻을 펼치고, 저희 모자를 잊지 않겠다는 약조만 해 주신다면 소첩은 어떤 고초도 이겨낼 것입니다.”
“내가 설사 상국(相國)의 자리에 오른다한들 어찌 처자식을 버려두고 부귀와 영달을 취하겠소.”
부인 두씨는 남편과 굳게 약조하고 길 떠날 남편을 위해 밥상을 푸짐하게 차리기로 했다. 어렵게 암탉 한 마리를 잡았다. 그러나 막상 불을 지필 나무가 없었다. 두씨는 대문의 빗장을 뽑아 닭을 삶고 밥을 지었다. 든든하게 배를 채운 백리해가 이별을 고하자 두씨는 아들을 안고 감춰두었던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후일 귀하게 되더라도 소첩을 잊지 마소서.”

남편을 떠나보낸 두씨는 길쌈과 날품으로 하루하루 힘겹게 연명해 갔다. 손톱이 닳고 손바닥에 못이 박이도록 일을 했다. 남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여기고 열심히 일한 덕에 두씨의 손을 빌리려는 사람은 날로 많아졌다. 그러나 정작 두씨가 기다리는 남편 소식은 3년이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그녀는 더욱 마음을 굳게 먹고 묵묵히 아들을 키우며 남편이 소식을 전해 올 날을 기다렸다. 그녀는 남편의 학식과 고매한 인품에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다만 시운이 따르지 않았을 뿐이니 때가 이르면 틀림없이 한 나라의 동량이 될 것’이라 굳게 믿었다.
하늘은 가혹했다. 5년이나 계속된 흉년으로 사람들은 하나둘씩 고향을 등졌고, 일거리를 잃은 두씨도 더 이상 집을 지키고 살아갈 방도가 없었다.
“집을 떠나면 어디서 서방님을 기다린단 말인가? 하늘은 참으로 무심하시구나.”
두씨는 결국 아들 시(視)를 데리고 정든 고향을 등져야 했다. 이곳저곳을 떠돌며 귀천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을 해서 근근이 주린 배를 채우고 아들을 키웠다. 그러면서도 남편 소식을 들을 수 있도록 항상 눈과 귀를 열어두었다. 달빛이 처량하게 창문으로 스며드는 밤이면 남편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하루가 여삼추라 하더니, 벌써 십 년이 흘렀구나. 하늘이 무심치 않고 부부 인연이 변치 않는다면 언젠가는 서방님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또 몇 년 세월이 훌쩍 흘렀다. 전국시대 참혹한 병화의 말발굽에 차이며 그녀의 기약 없는 방랑생활은 계속됐다.

한편 아내와 작별한 백리해는 제(齊)나라에서 청운의 꿈을 펼치려 했다. 그러나 누구도 양공(襄公)에게 그를 천거하는 사람이 없어 나이 사십이 되도록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걸식으로 세월을 탕진했다. 낙양에서는 주왕(周王)의 아들 퇴(頹)에게 의탁하며 소를 기르기도 했다. 한때 처자 생각에 고향을 찾기도 했으나 아내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다시 아내를 찾아 천하를 떠돌던 그가 우여곡절 끝에 우공(虞公)의 천거를 받아 중대부(中大夫)가 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우공이 나라를 진(晋)나라에 빼앗기게 되자 그는 진국(秦國)으로 시집가는 백희(伯姬)의 추종관에 임명됐다. 추종관이란 다른 나라로 시집가는 공주를 따라가 그 나라에 정착해 사는 관원이다. 백리해는 하늘을 우러러 한탄했다.
“나를 알아주는 주인을 아직 만나지 못해 높은 뜻을 펼 수 없으니 한스럽기 그지없구나. 이제 다 늙어 추종관으로 내몰리니 일신의 욕됨이 어찌 가볍다 하리.”
결국 백리해는 백희를 호송하던 도중에 초(楚)나라로 도망쳤다. 진(秦)의 목공(穆公)이 추종자의 명단에 백리해의 이름만 올라 있고 사람이 보이지 않아 묻자, 공손지가 대답했다.
“백리해는 현인이옵니다. 우공이 간할 수 없는 위인임을 알고 한번도 간하지 않았으니 지혜롭고, 우공을 따라 진(晋)에 갔으나 그의 신하가 되지 않았으니 충신입니다. 경세의 재주를 지녔으나 지금까지는 때를 만나지 못했을 뿐이오니 그를 데려와 중용하시면 필시 나라의 근간을 세울 것입니다.”
공손지의 말을 들은 목공은 도망친 백리해를 수소문했다. 백리해는 남해에 있는 초왕의 목장에서 목마자로 말을 키우고 있었다. 목공은 초왕에게 사신과 양피를 보내 백리해를 죄인의 명목으로 진나라로 압송하겠다는 뜻을 전한 뒤 그를 진국으로 데려왔다.

백리해의 부인 두씨도 아들 시와 함께 천하를 정처 없이 떠돌다가 진나라에 들어왔다. 살림은 여전히 궁핍했다. 남의 빨래를 해주고 받은 대가로 겨우 입에 풀칠을 했다. 장성한 아들 시는 사냥을 하고 씨름판에서 뒹굴면서 두씨의 속을 썩였다. 어느 날 두씨는 남편 백리해가 진나라 상국이 됐다는 소문을 들었다. 가슴이 뛰었다. 30년 만에 접한 남편의 소식에 빨래감을 팽개치고 남편을 만나기 위해 달려갔다. 두씨는 퇴궐 중인 백리해를 먼발치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두씨는 그러나 남편이 앞을 지나자 고개를 숙여 피했다.
‘지금 이런 모습으로 서방님의 앞에 나타난다면 위명에 누를 끼치게 될 것이다. 이제야 때를 만나 높은 뜻을 펼치시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두씨는 눈물을 흘리며 남편에 대한 모든 것을 잊기로 마음을 굳혔다. 아들 시에게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궁궐에서 세탁부를 구한다는 방이 나붙었다. 두씨는 자원해 궁에 들어갔다. 상국이 된 남편을 조금이라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두씨는 열심히 빨래를 해서 모두 그녀를 좋아했다. 그러나 그토록 그리던 남편의 모습을 대할 기회는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하루는 백리해가 당상에 앉아 있고, 악사들이 낭하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모습을 두씨가 보게 됐다. 두씨는 궁중의 하녀를 붙잡고 부탁했다.
“이 늙은이가 미천하지만 악(樂)에 대해 들은 바가 많으니 저 낭하에서 한 곡만 연주할 수 있도록 해 주시오. 이 늙은이의 소원이오.”
하녀는 두씨를 음악을 연주하는 악사에게 데려가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악사는 두씨에게 물었다.
“당신이 배운 음악은 무엇인가?”
“거문고도 타고 노래도 좀 부릅니다.”
악사는 거문고를 내주며 두씨에게 한 곡 타보라고 했다. 두씨는 거문고를 안고 연주를 했다. 두씨의 연주는 청아한 가운데 격조가 있고, 깊은 애조까지 담겨 듣는이들을 모두 심취시켰다. 그녀의 탄주에 감탄한 악사들이 이번에는 두씨에게 부탁했다.
“당신의 기예는 우리가 감히 흉내낼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오. 내가 상국께 고할 것이니 당상에 올라 상국을 위해 노래를 한 곡 불러보지 않겠소?”
“그래 주시겠습니까!”
악사가 고하자 백리해는 허락했다. 두씨는 백리해가 앉아 있는 당상 뒤편에 고개를 숙이고 섰다. 가까이서 남편 모습을 대하자 30년을 기다려온 인고의 세월이 격정과 증오로 뒤섞여 눈물을 자아냈다. 백리해가 서산으로 기울어 가는 해를 보며 나직이 탄식하는 소리가 두씨의 귀에 들려왔다.
“30년, 각고의 노력 끝에 상국의 자리에 올랐으나 헤어진 처자식을 아직 찾지 못했으니 진정 안타까운 일이로다. 이렇게 당상의 자리에 앉아 있으나 가시방석이요, 산해진미가 좁쌀밥만 못하구나.”
두씨는 목이 메었다. 남편은 30년 전의 약조를 아직 잊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머리를 숙이고 시름에 젖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작별할 때 알을 품은 암탉을 잡아 빗장으로 불을 지펴 삶고 끓여 눈물로 상을 차렸소. 오늘날 상국의 자리에 오르니 그때의 일을 정녕 잊으셨는가? 아버지는 산해진미로 배부르나 아들은 굶주리고, 지아비는 비단옷을 자랑하나 아내는 궁중에서 빨래를 한다네. 아서라, 지키지 못한 그날의 맹세가 허망스레 잦는구나.”
노래를 듣던 백리해는 깜짝 놀라 일어섰다. 노래의 가사가 자신이 부인과 이별하던 그때를 그리고 있지 않는가? 백리해는 노래를 부르는 두씨에게 다가갔다.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떨구며 노래를 부르는 노파가 자신의 아내라는 사실을 알고 부둥켜안으며 섧게 울었다.


■발문
장창화미(張敞畵眉)란, 한나라 장창이란 사람이 아내를 위해 눈썹을 그려줬다는 고사에서 비롯된 말이다. 그는 부인을 끔찍이 사랑했다. 조정에서 회의가 끝나기 무섭게 아내의 얼굴을 보기 위해 말을 몰아 집으로 향했다. 마부에게 빨리 달리라고 채근하는 것은 예사였고, 때로는 자신도 마부 옆에 앉아 부채로 말의 엉덩이를 쳐서 빨리 달리도록 했다고 한다.
백리해가 현인으로 사록에 이름을 남긴 데는 장창의 경우와는 대조적으로 부인 두씨의 용기 있는 믿음과 내조가 크게 작용했다. 남편의 학식과 재능을 굳게 믿었던 두씨는 형편이 가난하여 처자식을 두고 타국으로 나갈 수 없었던 백리해가 편한 마음으로 출사 길에 오르도록 힘을 얹고 믿음을 주었다. 나아가 혹독한 세파에 결코 주저앉지 않고 30년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기다린 끝에 아름다운 재회를 맞게 된다.
백리해가 절치부심, 상국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일신의 영달을 노린 결과라기보다 두씨와 맺은 약조를 한시도 잊지 않고 되새김질한 공덕으로 봐야 하리라.
목공은 훗날 백리해가 처자식과 상봉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좁쌀 천 종(鍾)과 금백 한 차를 선물로 하사했다. 또한 활쏘기와 사냥으로 무예를 연마한 백리해의 아들 시를 군의 대부로 삼았다. 시는 타고난 용맹과 뛰어난 무예로 연이어 타국을 정벌한 공로가 인정돼 장군이 되었으며, 서걸술(西乞術), 건병(蹇丙)과 더불어 진나라의 삼수(三帥)로 이름을 드높였다.
이 모두 오로지 남편의 입신양명을 위해 반평생을 헌신한 두씨가 온몸으로 일궈낸 값진 영화가 아니랴.

무협·만화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