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사진수집에 빠진 것은 1974년. 마산군의학교를 마치고 독일에 물리치료와 유리를 공부하러 가면서부터. 가톨릭 신자인 그가 유학생활을 하면서 외국인 선교사와 신부를 만난 게 계기가 됐다. 친밀한 사이가 된 어느 날 그들이 보여줄 것이 있다면서 내놓은 것이 빛 바랜 구한말 우리 조상들의 흔적이 담긴 사진과 필름이었다. 우리의 역사적 사료들이 이국 땅으로 떠돌아 다닌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했고 가슴이 아프기도 했다.
“그곳에서 만난 한 신부님은 너희 나라 사람들은 과거의 유산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더라고 나무랐지요. 한국사람 몇 명에게 사진을 보여줬지만 아예 관심이 없는 모습이었다고 했어요. 이 말을 듣는 순간 몹시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1978년 귀국한 그는 사진자료 수집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선교사나 외교관, 의사 등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왔던 외국인의 후손을 찾아 독일, 프랑스, 미국 등 어디든 날아갔다. 일일이 수소문해 찾아야 하기 때문에 한번 나가면 3, 4개월 걸리는 고행이 보통.
언더우드, 아펜젤러에서부터 인천에서 무역상을 한 독일의 마야와 프랑스 여행가 코르페, 고종의 전의였던 미국인 애비슨가 등을 샅샅이 훑고 다녔다. 한국관련 사진자료가 있다면 만사를 제쳐두고 어느 나라 박물관에든 달려갔다.
사진 수집 중 겪은 우여곡절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 독일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3개월간 병원신세를 졌는가 하면 프랑스 코르페가를 찾아갈 때는 비자가 없어 육로를 통해 밀입국까지 했다. 다행히 코르페 손자를 찾아 비교적 연도별 정리가 잘된 사진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세계인쇄기술의 본산으로 알려진 통독 전 동독 라이프치히에도 자료가 많을 것 같아 첩보원 같은 밀행을 감행했다. 겁도 없이 들어갈 때는 쉽게 들어갔지만 나올 때는 검문소마다 차를 세워 검문하는 바람에 이러다 정말 죽는 게 아닌가 하고 손에 땀을 쥐었다고 한다 .
“유리원판이나 사진을 살 수 있으면 사고 얻기 어려운 사진은 그 자리에서 카메라로 찍어왔어요. 쏟아 부은 시간도 많지만 대구에서 유리공장을 하면서 번 돈도 많이 들어갔습니다.”
이런 노력으로 그가 발굴, 입수한 사진은 5만여점. 유리원판만 4000여점에 이른다. 우리나라 사진뿐 아니라 이탈리아, 이집트,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세계 20여개국의 희귀 사진자료도 상당수 소장하고 있다. 이들 나라의 유리원판만 2500여점으로 개인으로선 국내외에서 가장 많이 보유해 사진자료에 관한 한 ‘국가대표’인 셈이다.
| ◇일제의 철도를 파괴하려다 체포된 중국인과 한국인. 독립군인 이들 손에는 철도 나사를 풀기 위해 사용했던 장비가 들려져 있다. |
고종황제 즉위식 축하행렬, 명성황후, 아들 낳았다고 젖가슴 내놓고 다니는 아낙네, 싸전거리, 기생, 선비, 중국 옷 입은 임정요인 등 갖가지 인물과 풍물이 사진속에서 살아 숨쉬는 듯하다. 이들 사진은 사료적 가치도 높은 편이다.
그동안 모은 사진들을 이용해 정씨는 ‘100년 전의 한국’ ‘한국의 100년’ ‘일제의 침략사’ 등 6권의 사진집을 자비로 출간했으며, 그간 전국을 돌며 40여차례의 전시회를 가졌다. 특히 이들 사진자료 덕분에 조선왕족의 신사참배, 광개토대왕비와 백두산 정계비 조작, 동학운동가의 활약상 등 새로운 사실이 많이 밝혀지게 됐다. 게다가 종묘대전이나 궁궐 보수, 복원 공사도 그의 옛 사진을 참고로 한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그의 열정과 달리 여전히 역사에 대한 우리사회의 관심이 적다는 사실이 그를 답답하게 한다.
서울정도 600년 행사가 너무 초라한 것 같아 권당 6만원 하는 100년 전 한국사진첩 100권을 시에 기부해 각 구청의 주민들이 볼 수 있게 했지만 몇 년 뒤 어느 구청에도 그 책이 남아 있지 않아 그는 분개했다고 한다.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과 고조선, 부여까지도 자국역사에 편입시키려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해 우리나라는 너무 안이하게 대처하고 있습니다.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이 있을 때만 언론이나 국민이 잠시 흥분하다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려요. 어떤 외교관은 일제만행 사진첩을 만든다고 하니까 공연히 일본을 자극하지 말라는 거예요. 어느 나라 외교관인지 정말 기가 찰 노릇이었어요.”
| ◇중국인 복장을 하고 있는 임시정부 요인들. |
말로만 떠들지 말고 이들 나라의 주장이 허구임을 입증할 만한 역사자료를 발굴·수집하고 연구를 뒷받침해서 대응책을 세워야 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이런 역사의식이 없이는 언제 다시 주변국에 수난을 당할지 모른다는 우려다.
“서재필 박사가 세운 독립문의 경우도 잘못 알려진 게 많습니다. 독립정신을 고양하기 위해 만들었다고만 알려져 있지요. 무악재를 넘어 서울로 들어올 때 영은문을 거치게 되는데 그 문보다 50m 앞에다 세웠지요. 영은문은 중국 사신을 환영하는 문으로 그 앞에다 세운 까닭은 모화사상과 사대주의를 없애고자 한 서 박사의 철학이 담긴 겁니다. 이제는 길이 뚫려 독립문이 이전됐지만 아무렇게나 옮겨 놓다보니 서대문형무소를 향하고 있어요.”
문화재관리관이나 학자들의 단견을 비판하는 그는 이 밖에도 지적할 게 수두룩하다고 말한다.
| ◇어린티가 가시지 않은 평양항공소년병. |
옛 사진 수집에 모든 것을 바쳐온 정씨에게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화성시가 올 초 이 자료들을 영구전시할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그는 앞으로 세워질 건물에다 사진전시는 물론 20여개국 주한대사관과 연계해 각국 희귀사진 전시관을 꾸미고 그간 모아온 불두(佛頭)상 450개와 기독교 성화들도 전시할 계획이다.
“일부에서는 우리나라도 잘살게 됐는데 왜 옛날 못살고 일본에 수탈당한 아픈 과거를 까발리고 다니냐며 항의를 해요. 하지만 우리나라가 제대로 나아가려면 과거를 제대로 알아야지요. 과거없는 현재와 미래가 있을 수 있나요.” 그의 쩌렁쩌렁한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전성룡 기자 sychun@segye.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