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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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多文化 한가족 시대]필리핀 며느리서 예산댁으로…한국정착 6년

"똑같은 한국인으로 차별 안받고 살고 싶어"

최근 국제결혼으로 결혼이민자가 급증하고 있으나 이방인에 대한 배타적인 문화와 언어문제 등으로 한국사회 정착에 어려움이 많다. 그러나 이 가운데 상당수는 우리 사회의 편견과 역경을 이겨내고 당당한 한국인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지역사회 주역으로 활약하고 있는 이들의 삶과 애환을 주 1회 연속으로 보도해 다문화 가족의 현주소를 알아본다.
◇레가닛씨가 지난21일 충남 예산읍 예산지역 아동센터에서 어린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6년 전 필리핀서 시집 온 그는 대학 때 익힌 영어실력으로 1주일에 3일씩 아동영어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예산=임정재 기자

“‘타이거’가 뭐지… ‘어흥’ 있쟎아.” “호랑이! 하하하 우리 선생님 재미있다.”

지난21일 오후 충남 예산군 예산읍 지역아동센터 영어교실.

예산역 앞 한 교회를 빌려 마련된 교실에서 자그만 체구의 한 외국인 여성이 열살 안팎의 개구장이 20여명과 입씨름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 다독거리랴, 영어 가르치랴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배인 이 여성은 지난2002년 한국으로 시집온 필리핀이 고향인 아이다 레가닛(49·예산군 신양면 시왕리)씨다.

올해로 결혼 7년차인 그녀는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1년여 전부터 어학교육이 부실한 이 지역 아이들을 모아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사투리까지 섞는 한국어 구사 능력으로 가르치는 솜씨가 뛰어나 어린이들 사이에는 ‘아이다 아줌마’로 통한다.

가정이나 지역사회에서 그녀는 피부색깔만 약간 다를 뿐 당당한 한국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예산지역에서는 국제결혼 여성 모임의 회장으로 언어와 가정폭력 등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동료들을 돕는 데 앞장서 ‘외국인 이주여성의 대모’로 불린다.

하지만 그녀가 한국 아줌마로 변신하기까지는 파란만장한 여정을 걸어야 했다.

필리핀 마욘 화산 부근 가마레미솔 출신인 그녀는 40세가 넘도록 결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10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으나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가정형편이 어려워 동생 뒷바라지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남편 정강희씨와 다정하게 포즈를 취한 레가닛씨.

20세 때 마닐라의 한 속옷공장 근로자를 시작으로 라디오 방송 리포터, 대만의 전자회사 사원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동생들을 위해 생활비를 벌었다.

한국과의 인연은 2001년 홍콩에 거주할 때 우연히 찾아왔다. 동생들을 모두 결혼시키고 홀가분하게 캐나다 이주를 준비하던 그녀에게 한국 남자와 국제결혼한 친구가 한국행을 권유한 것이다.

한 종교단체의 주선으로 담배를 재배하고 있는 남편 정강희(53)씨를 소개받으면서 독신을 고집하던 그녀의 인생행로는 완전히 바뀌었다.

“사실 한국 남자들의 가정폭력 얘기를 들었고 농촌으로 시집간다는 부담은 있었어요. 아버지도 한국이 남성 위주 사회라 힘들다며 반대했고요”

그녀는 그러나 “남편과의 나이차가 적고, 성품도 착해 이것이 운명인가 보다 생각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2002년 입국해 시집살이를 시작한 그녀의 한국생활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처음에 음식과 문화적 차이를 쉽게 적응하지 못해 도망가야겠다는 궁리뿐이었다. 40여 가구의 동네사람 가운데 단 한명뿐인 외국인에게 쏟아지는 뭇시선들 또한 적지 않게 부담스러웠다. 말이 안 통해 생기는 답답증은 하소연할 곳조차 없었다.

“동네사람들이 말을 거는 게 무서웠어요. 외출하다 사람들이 지나가면 피했다가 갔으니까요”

한국에서 살려면 언어 소통문제부터 해결해야한다고 생각한 레가닛씨는 이때부터 남편과 많은 대화를 나누려 노력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지금도 늘 한영사전과 영한사전이 놓여있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해결하기 위해서다.

실전을 쌓기 위해 동네 이웃에 ‘마실’을 다니기 시작했다. 이웃들과 같이 수다를 떨며 한국어도 늘고 정도 쌓을 수 있었다. 남편은 동네나 친구 모임 때마다 그녀를 동반, 자신감을 키워줬다.

몇 달 만에 말문이 트이고 동네 사람들과도 친근해지자 그녀의 생활은 크게 달라졌다.

이웃 아줌마들과 어울리면서 자연스럽게 농사일을 익힌 탓에 지금은 억척 농사꾼으로 변했다. 남편 정씨는 “3000평의 담배밭과 2000평이 넘는 논농사도 이제는 아내가 없으면 어렵다”고 말했다.

그녀는 “얼굴도 그을리고 손도 거칠어졌지만 동네 사람들과 함께 하는 담배 농사일이 즐겁다”며 “일이 끝나고 다같이 낚시를 가거나 부침개를 해먹는 재미에 푹 빠졌다”고 자랑했다.

2006년 국적을 취득한 그녀는 올 들어 두 차례나 짜릿한 경험을 했다. 국회의원 선거와 농협 조합장 선거에 유권자로 참가한 것이다.

그녀는“당당한 한국인으로 설 수 있도록 참고 격려해준 시어머니와 시동생들, 동네 사람들 모두에게 감사드린다”며 “이제는 나를 도와준 사회를 위해 무엇인가 기여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고 말했다.

야간대를 다닐 때 익힌 영어실력을 바탕으로 1주일에 3일씩 아동 영어강사로 활동하고, 어려움을 겪고있는 다문화 가족에 대한 상담활동을 펴고 있는 것도 그 같은 이유에서다. 지역 다문화가족의 ‘대모’로 그녀가 느낀 우리나라 국제결혼 가정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나이, 성격, 환경 등을 고려하지 않고 일단 맺어주고 보자는 방식이다보니 출발부터 잘못된 거죠. 처음부터 서로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을 맺어주면 지금 벌어지는 문제들은 휠씬 줄어들 겁니다”

그녀는 “결혼을 비즈니스로 생각하는 문화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꼬집은 뒤 “외국에서 온 여성들이 대부분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한국에 시집온 현실을 고려해 차별받지 않고 경제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한국 정부가 도와주었으면 좋겠다”고 말을 이었다.

아기가 없어 입양을 고려 중인 그녀의 소원은 주기적으로 고향을 방문하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녀는 “5년에 한 번씩 고향에 가기로 남편과 약속했지만 자주 갔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김치 맛에 푹 빠져 필리핀에 가더라도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곧 돌아오고 싶을 것”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예산=임정재 기자 jjim61@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