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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20〉먹는다는 것(eating)

“오늘 내가 먹은 음식이 내일의 나를 만들어”
집 주변으로 잔설이 희끗희끗하고, 호수는 꽝꽝 얼어붙었다. 몸이 으슬으슬해서 멸치를 팔팔 끓여 우려낸 국물에 삶은 국수를 말아 한 끼를 때운다. 입 안이 개운하고 배는 불룩하다. 뭔가를 먹는 일은 그 자체로 생의 순수한 황홀경이다.

지금부터 70여 년 전 저 북방의 한 시인은 국수를 소재로 삼은 빼어난 시를 적었다.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내려 메기고/ 눈 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 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 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 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싸서 은근하지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양지귀 혹은 응달쪽 외따른 산옆 은댕이 예데가리밭에서/ 하룻밤 뽀오얀 흰 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옛날 한가하고 즐겁던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여름볕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의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텁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든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여느 하룻밤/ 아배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배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사발에 그득히 사리워 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러 났다는 먼 옛적 큰마니가/ 또 그 집 등새기에 서서 재채기를 하면 산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옛적 큰아바지가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희스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익은 동치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의젓한 사람들과 살뜰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素朴)한 것은 무엇인가”(백석, ‘국수’, 1941.4)

◇사람은 자연에서 나는 거의 모든 것을 먹는 잡식동물이지만, 음식은 삼가고 가려 먹는 게 마땅한 일이다. 온갖 화학물질을 첨가한 뒤 우리 식탁에 오르는 현대의 가공식품들은 우리 몸에 해로울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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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는 소맥이라고 부르는 밀을 도정하고 제분해서 얻는 밀가루로 만든다. 밀가루는 글루텐이라는 단백질의 함량 차이에 따라 강력분, 중력분, 박력분으로 나뉘는데, 국수는 중력분으로 만든다. 기원전 4000년 무렵 황하 유역의 유적지에서 국수 비슷한 것이 발굴된 것을 보아 국수의 역사의 아주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민족도 일찍부터 국수를 먹었다고 한다. 본디 국수는 귀한 잔치에 내놓는 음식이었다. 미국의 원조물자로 밀가루가 흔해지면서 국수는 서민 음식으로 자리 잡는다. 저 산골에 국수틀이 있었나 보다. 시인이 먹었다는 이 국수는 밀이 아니라 “어느 양지귀 혹은 응달쪽 외따른 산옆 은댕이 예데가리밭”에서 수확한 메밀을 빻아 국수틀로 뽑은 것이다. 아배는 왕사발에, 아들은 새끼사발에 국수가 그득히 담겨온다. 쩔쩔 끓는 아랫목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후루룩거리며 국수를 먹는 광경이 손에 잡힐 듯하다. 선배 시인의 흥겨운 시를 떠올리며 국수 한 그릇을 거뜬히 비우고, 새삼 ‘먹는다는 것’의 본질에 대해 생각에 잠긴다.

시인 두보는 대력 3년(768년), 강릉(지금의 허베이성)에 사는 동생 두관에게서 편지 한 통을 받는다. 편지에는 살기 좋은 땅을 찾았으니 하루속히 삼협에서 나오라고 적혀 있었다. 두보가 살던 고장의 산천은 장엄하되 풍토는 거칠고 인정은 메마른 곳이었다. 진저리가 났던 터라 두보는 서둘러 가족과 함께 살던 고장을 떠나 강릉으로 떠난다. 가족은 강릉의 당양현에 머물게 하고, 두보 자신은 강릉에 거처를 두고 사람들을 두루 만난다. 계절이 바뀌자 가족에게서 편지를 받는데, 지게미나 채소마저도 먹지 못한다고 적혀 있었다. 친지들에게 어려움을 호소하고 손을 벌려 보았으나 그들이 재물을 나눠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날이 갈수록 가난한 두보를 멀리했다. 두보는 가족에게 돌아가며 강릉에서의 굴욕을 “배고파 집집에서 쌀을 꾸고, 근심에 겨워 도처에서 술을 찾았네”라고 시에 적었다.

그해 가을 두보는 다시 가족을 이끌고 강릉을 떠나 동으로 나아가 살길을 찾았다. 두보는 강물을 따라 이리저리 떠도는 제 처지를 비관하며 “먹을 것을 구하려 괴롭게 꼬리쳤지만, 늘 은혜 갚은 물고기를 생각하였네”라고 시에 적었다. 가난 때문에 처자식의 입에 들어갈 음식을 구할 수 없는 가장의 비애와 쓰라림은 두보라고 더하거나 덜하지 않았다. 입에 들어가는 음식이 끊긴 자의 처지는 그 어떤 비참함보다 더 남루하고 비천하다. 훗날 시성(詩聖)으로 추앙을 받은 두보도 저와 식구들의 입에 들어가는 음식이 끊기는 지경이 되자 제 인생을 돌아보고는 “버려진 물건 같은 백년 인생”이라고 괴로워하며 탄식하였다.

사람이 음식을 먹는 것은 자연으로 타고난 바다. “사람은 위로 하늘과 이어지지 않고, 아래로 땅에 박혀 있지도 않다. 오로지 위장을 근본으로 삼기에 먹지 않으면 결코 살 수 없다.”(왕런샹, ‘중국음식 문화사’) 우리 몸에 입과 이가 있는 것은 음식을 씹고 삼키기 위함이고, 몸 아래에 구멍이 있는 것은 먹은 것을 배설하기 위함이다. 옛사람은 사람의 삶이란 것이 음식에서 기(氣)를 얻는 것은 마치 초목이 흙에서 기를 얻는 것과 같다고 적었다.

한 위대한 서양의 작가는 사람을 음식을 담는 가죽 자루라고 비범한 성찰을 적었다. 사람이 먹고 마시는 생물학적 존재라는 사실은 사람의 본질을 규명하는 데 지나쳐서는 안 될 중요한 조건 중의 하나다. 인류는 자연에서 나는 것을 가리지 않고 먹는 잡식동물이다. “우리가 잡식동물이라는 사실은 우리의 육체(인간은 잡식동물에 알맞은 다용도의 치아와 턱이 발달해 있다. 그리하여 고기를 찢거나 풀을 갈고 빻는 일을 똑같이 잘할 수 있다)와 영혼 양 측면에서 우리의 본성을 형성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우리의 뛰어난 관찰력과 기억력 그리고 자연 세계에 대한 궁금증과 실험적 자세는 상당부분 잡식동물이라는 생물학적 사실에게 기인한다. 우리는 다른 생물들의 저항을 무력화하고 그들을 음식으로 삼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적응해왔다.”(마이클 폴란, ‘잡식동물의 딜레마’) 사람이 생물계에서 우월적 지위를 가진 포식자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자연 환경을 불과 도구를 써서 음식사슬로 편입하여 바꾸는 최적화 수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불을 다룰 줄 알고, 동식물을 채집하고 포획하여 도구를 써서 소화하기 쉬운 음식으로 만드는 존재이다. 다시말하면 “우리는 음식을 통해 자연을 문화로 바꾸고, 세계의 육신을 우리의 몸과 마음으로 탈바꿈시킨다.”(마이클 폴란, 앞의 책) 인류의 역사는 우리 몸 밖의 자연을 우리 몸 안으로 들여보낸 것을 큰 축으로 삼는 역사다. 사람은 지구 위에 출현한 이래 무언가를 먹고 살아왔으며, 종을 퍼뜨려온 존재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다름 아니라 세상의 몸이다.”(마이클 폴란, 앞의 책) 우리는 세상의 몸을 먹고 그 세상의 일부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먹고 마시는 것과 관련된 역사는 곧 인류 생존의 장엄한 역사이다.

하향하는 물질의 흐름을 거슬러 오르는 ‘생명의 약동(elan vital)’은 우리 몸 안에 들이는 외부의 물질에서 나온다. 이 물질이 곧 음식이다. 음식은 에너지를 만들고, 그 에너지는 생명의 불꽃을 타오르게 한다. 먹고 마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몸은 머지않아 작동을 멈추게 될 것이다. 인류는 자연에서 나는 거의 모든 것을 먹는 잡식동물이지만, 음식은 삼가고 가려 먹는 게 마땅한 일이다.

원나라의 음선태감(飮膳太監)의 직위에 있던 흘사혜는 이렇게 적었다. “비록 음식에는 백 가지 맛이 있지만 그 정수를 구해야 한다. 그 음식 안에 양생을 보태고 돕는 데 좋은 점, 새 것과 묵은 것의 차이, 온랭한열(溫冷寒熱)의 성질, 다섯 가지 맛의 편중으로 생기는 병이 있는지를 헤아려야 한다. 만약 맛이 지나치게 좋고, 새로운 것과 오래된 것을 가리지 않고, 만들 때 기준을 초과했다면 모두 질병을 초래할 수도 있다. 마땅하면 행하고, 마땅하지 않으면 피해야 한다. 만약 임산부가 행동을 삼가지 않고, 유모(乳母)가 먹는 음식을 조심하지 않으면, 태어날 아이에게 병이 생긴다. 만약 먹는 데만 몰두하고 피해야 할 음식을 잊어버린다면, 질병이 생겨 몸에 잠복해 있어도 죽을 때까지 깨닫지 못한다. 백년 인생을 한때의 맛으로 잃어버린다면 그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음선정요·飮膳正要’, 왕런샹의 앞의 책에서 재인용)

근대 이전에 인류는 먹을거리가 부족해서 걱정이었지만, 이제는 풍요한 먹을거리 앞에서 무엇을 어떻게 먹을 것인가, 하는 역설적인 곤경과 만난다. 자본주의와 산업 기술은 음식의 영양학적 성분만이 아니라 음식사슬까지 비틀어버린다. 온갖 화학물질을 첨가한 뒤 우리 식탁에 오르는 현대의 가공식품들은 우리 몸에 해로울 수도 있다. 오늘날의 육류 대부분은 공장식 농장에서 사육된 닭이나 돼지나 소를 도살해서 얻은 것들이다. 야생과는 달리 공장식 농장에서 사육되는 동물들은 우리 식탁에 오르는 과정에서 학대를 당한다. “소는 뿔을 제거당하고 거세되고 호르몬과 항생제가 투약되고 살충제가 뿌려지고 시멘트 판에 올려진다. 또한 적절한 몸무게가 될 때까지 곡물, 톱밥, 찌꺼기, 오물을 먹으며, 트럭을 타고 자동화된 도축장으로 운송되며 그곳에서 도살된다.”(제레미 리프킨, ‘육식의 종말’) 쇠고기에는 다량의 호르몬과 항생제, 그리고 살충제가 들어 있고, 소들의 사육과 도축은 그 동물들에게 고통을 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육식 행위는 동물에게 고통을 주는 잔혹한 방식으로 고기를 얻는 이런 현대적 시스템에 대해 고민하게 하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고 하면서, 사람이 아니라고 해서 다른 동물들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것은 괜찮단 말인가, 하는 윤리적 딜레마에 빠지게 한다.

그런 까닭으로 어떤 사람들은 기꺼이 육식의 관행을 버리고 채식주의자의 길을 선택한다. 채식주의자로 산다는 것은 인류의 치아와 위장 따위의 소화기관 구조에 새겨진 “지구상에서 존재한 오랜 시간 동안 고기를 먹고 살아왔다는 진화사의 사실”을 거스르는 일이고, 다수의 육식주의자들에게 둘러싸여 상대적으로 소수자인 채식주의자로 살아가는 것에서 빚어지는 소외와 불편을 견뎌야 함을 뜻한다. 먹는 행위는 목숨줄과 이어져 있고, 인류는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먹어야 한다. 그게 진실이다. 우리가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우리는 달라진다. 음식이라는 표층 아래에 “실제로는 정치, 경제, 사회, 기술 등 여러 요소가 혼합된 인간 문화의 정수”(장인용, ‘식전’)가 숨어 있는 까닭이다. 오늘 내가 먹은 음식이 내일의 나를 만든다. 우리 입으로 들어오는 음식은 생태학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우리를 바꾸고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드러낸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마이클 폴란, ‘잡식동물의 딜레마’, 조윤정 옮김, 다른세상, 2008

●장인용, ‘식전(食傳)’, 뿌리와이파리, 2010

●왕런샹, ‘중국음식 문화사’, 주영하 옮김, 2010

●한성무, ‘두보평전’, 김의정 옮김, 호미,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