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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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문회 보다가 범행 결심"… 황교안, 박영수에 큰 빚 졌네!

2003년 부산동부지청에 함께 근무하며 각별한 우정 쌓아

황교안 국무총리(왼쪽)와 박영수 변호사.
“조직 내에 있을 때에도 상하 간에 신망이 아주 두터운 분이었습니다. 여러 부처 장관들이나 국회와 두루 협조하면서 부드럽게 총리직을 수행할 수 있는 적합한 인물이 아닌가 합니다.”

지난 10일 서울고검장을 지낸 박영수(63) 변호사가 황교안(58) 국무총리를 상대로 한 국회 인사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한 말이다. 병역면제, 전관예우 논란 등으로 궁지에 몰린 황 총리를 위해 박 변호사는 그야말로 최선을 다해 그를 ‘변호’하고 나섰다. 하지만 이것이 5년 전의 소송 결과에 불만을 품은 어느 업자에 의한 테러의 단초가 되리라곤 박 변호사 본인은 물론 황 총리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18일 경찰에 따르면 모 건설업체 대표 이모(64)씨의 박 변호사 습격 사건은 10일 TV로 전국에 생중계된 황 총리 청문회가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이씨는 경찰에 자수한 뒤 “최근 TV를 보다가 황 총리 후보자 청문회에 박 변호사가 증인으로 출석한 것을 보고 ‘거물급’이라는 생각이 들어 전관예우가 틀림없다고 판단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씨는 2010년 ‘슬롯머신 대부(代父)’로 알려진 정덕진씨를 검찰에 고소했는데, 당시 박 변호사를 변호인으로 선임한 정씨는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지난 5년 동안 내내 ‘검찰이 박 변호사에게 전관예우를 해준 것 아닐까’라는 의심을 품었던 이씨는 마침 TV에 등장한 박 변호사를 보고 전관예우를 받을 만한 거물급 전직 검찰 간부라는 확신이 들어 범행을 결심했다는 것이다.

경찰 조사 결과 이씨는 흉기를 준비한 뒤 16일 오후 6시부터 박 변호사의 서울 서초구 사무실 앞으로 찾아가 그가 퇴근하기만 기다린 것으로 드러났다. 사무실을 나서는 박 변호사를 붙들고 항의하던 이씨는 결국 17일 자정 무렵 흉기를 휘둘러 왼쪽 얼굴과 목 부위를 찔렀다. 박 변호사는 곧장 인근 대형병원으로 옮겨져 두 차례 봉합수술을 받았다. 상처 부위는 15㎝가량이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상처 부위에서 조금만 벗어났으면 경동맥이 있어 위험할 뻔했다”고 말했다.

사법연수원 10기인 박 변호사는 13기인 황 총리보다 세 기수 선배다. 검찰에서 박 변호사는 강력부와 특수부, 황 총리는 공안부에 각각 오래 근무했다. 비록 검찰 선후배 관계이기는 하나 대표적 ‘강력·특수통’으로 꼽히는 박 변호사와 역시 내로라하는 ‘공안통’으로 잔뼈가 굵은 황 총리가 서로 긴밀하게 교류할 일은 그리 흔치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검찰 안팎에는 두 사람의 각별한 인연이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인 2003년 부산동부지청 근무 시절 맺어진 것으로 여기는 이가 많다. 당시 박 변호사는 서울지검 2차장으로서 SK그룹 비자금 사건 수사를 성공적으로 지휘했음에도 수도권에서 멀리 떨어진 부산동부지청장으로 발령이 나 심기가 몹시 불편했다. 황 총리 역시 서울지검 공안2부장으로서 국가정보원 도청 의혹 사건 등 힘든 수사를 마치고 받은 새 보직이 부산동부지청 차장이란 현실에 기분이 썩 내키지가 않았다.

2002년 서울지검에서 2차장, 공안2부장으로 나란히 근무한 두 사람은 이렇게 부산동부지청에서 지청장과 차장검사로 재회하며 본격적으로 우정을 쌓기 시작했다. 둘 다 검찰 인사에 불만이 많았던 만큼 쉽게 의기투합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색소폰을 잘 부는 황 총리는 훗날 한 인터뷰에서 “2003년 부산동부지청 차장 시절 당시 지청장이었던 박영수 고검장님과 함께 지청 근처 카페에 갔다가 색소폰 연주를 듣고 홀딱 반해 배우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됐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박 변호사는 이때 부하로 데리고 있으며 눈여겨 본 황 총리가 지명되자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에 정치권의 청문회 증인 제안을 선뜻 수락했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 옛 사건 관계인으로부터 테러를 당했으니, 황 총리로서는 박 변호사한테 평생 갚아도 다 갚지 못할 큰 ‘빚’을 진 셈이 됐다. 법조계 인사들은 “‘비가 내린 뒤 땅이 단단해진다’는 옛말처럼 이 사건으로 두 사람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지지 않겠느냐”고 내다봤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