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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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찬의 軍] "고립주의와 아마추어 안보가 사드 파문 초래했다"

남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1000km 떨어진 동태평양에 위치한 갈라파고스 제도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 영향을 준 섬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수년전부터 경영학계를 중심으로 등장한 ‘갈라파고스 신드롬’이란 개념이 더 유명해지고 있다. 세계 추세와 동떨어진 채 자신들만의 표준을 고집하다 고립을 초래했다는 뜻으로 1990년대 이후 일본 제조업이 자국 시장에만 안주한 결과 경쟁력이 약화되어 세계시장에서 고립돼 화를 자초한 현상을 설명하면서 등장했다.

지난달 17일 국방부 순시에 나선 문재인 대통령이 국방부 회의실에서 행사를 마친뒤 합동참모본부로 향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자신들만의 규칙과 사고에 갇혀 외부의 변화에 둔감하게 대응하다 화를 입은 사례가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주한미군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발사대 4기 추가 반입에 대한 국방부의 보고 누락 의혹이다. ‘이 정도 표현이면 다 알아듣겠지’라는 자신들만의 생각으로 관성적인 행동을 했던 군은 ‘갈라파고스 신드롬’에 흠뻑 취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공개적으로 문제를 삼아야 하는지를 놓고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 “한국어야 아랍어야?”…그들만의 언어와 사고

한 조직이 어떠한 집단사고와 행동을 취하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언어다. 언어는 생각과 행동을 말과 글자로 드러내는 소통의 수단이지만 조직 외부에서 조직 내부의 일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진입장벽’의 역할도 한다.

방위사업청이 지난 1일 배포한 <적 최신 전차 잡는 현궁 품질인증 사격 시험 성공! 올해부터 본격 양산 돌입!> 보도자료를 한번 살펴보자. 품질인증 사격시험이라는 용어는 군에서 쓰이는 용어이므로 국민들이 정확히 이해하려면 세밀한 설명이 필요하다. 그런데 방위사업청은 “품질인증 사격은 국내 개발 유도무기의 연구개발 단계에서 충족된 성능이 양산품에서도 동일하게 구현되었는지를 확인하는 절차이다”라고 설명했다. ‘무기를 개발하면서 확인된 성능이 실제 제작된 제품에서도 나타나는지 확인하는 절차’인 품질인증 사격시험을 국민들이 방위사업청의 설명만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30일 오후 경북 성주군 성주골프장에서 사드 발사대가 하늘을 향하고 있다. 성주=연합뉴스
국방부가 사드 발사대 4기 추가 반입 사실을 청와대 국가안보실 보고 당시 누락했다는 의혹과 관련해 보고서에 오르내렸던 반입, 배치, 전개 등 군사용어는 일반인은 물론 군인이 아닌 공직자들도 헛갈리는 개념이다. 미군의 전략무기가 한반도로 이동할 때 주로 쓰이는 이 용어들은 언뜻 같은 뜻을 지닌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차이가 있다. 반입이란 미국이 우리나라로 무기를 들여오는 행위를 말한다. 전개는 미국이 군사적 목적으로 전략무기를 우리나라로 이동시키거나 이동 직후 단기간 내 돌아가는 경우에 사용된다. 배치는 장비를 일정한 장소에 설치해 실전에서 작전 운용할 수 있는 준비를 마쳤다는 의미다. 군인들끼리 대화를 나누거나 보고할 때는 이같은 용어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지만 배경 지식이 부족한 사람이 들으면 개념을 잘못 이해해 오해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사고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항공기나 자동차 사고의 경우 그 원인이 사고를 일으킨 당사자에게만 있지는 않다. 주변 상황이 모두 맞물리면서 사고가 발생한다. 사드 보고 누락 파문 역시 마찬가지다. 보고를 누락한 국방부의 잘못도 있지만 보고를 받았던 청와대 국가안보실도 책임이 있다는 게 군 안팎의 지적이다.

박근혜 정부에서 국가안보실을 이끌었던 김장수, 김관진 전 실장은 국가안보분야에서 많은 경험을 쌓았다. 김장수 전 실장은 육군참모총장과 국방부 장관을 거쳐 국회의원을 지냈다. 국방부 장관으로 재직하던 2007년 11월 김일철 당시 북한 인민무력부장을 만나 남북 국방장관 회담을 진행하기도 했다. 2012년 대선에서는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후보 캠프에서 활동했다. 김관진 전 실장은 2006~2008년까지 합참의장을 지냈고, 2010~2014년까지 국방장관으로 재직했다.

국방장관이나 합참의장을 역임한 예비역 대장들은 여느 장군들보다 넓은 시각으로 현안을 바라볼 줄 안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무회의나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 참석하면서 다양한 분야의 정보를 융합하는 노하우를 얻는다는 것이다. 군 관계자는 “전직 장관, 합참의장을 만나 안보 문제를 얘기해보면 야전군 지휘관을 끝으로 전역한 사람들보다 식견이 넓고 깊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지난달 21일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청와대 브리핑실에서 기자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반면 문재인 정부의 국가안보실은 출범 당시부터 우려섞인 시각이 많았다. 정의용 국가안보실장과 김기정 2차장은 북핵 문제와 4강 외교, 한미 동맹 업무 경험이 없다. 육사 38기 예비역 준장인 이상철 1차장은 남북 대화 경험이 풍부하지만 국방정책 전반에 대한 이해도나 능력은 검증되지 않았다.

군 안팎에서는 ‘척하면 척하고 알아듣던’ 박근혜 정부 당시 국가안보실이 아닌, 외교안보 현안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데다 전 정권으로부터 인수인계를 제대로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진 새 정부의 국가안보실을 상대로 국방부가 사드 관련 보고를 자신들이 해오던 방식대로 보고해 화를 자초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보고서는 기본적으로 그것을 읽는 사람이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작성해야 한다. ‘전임 정부 당시 보고한 사안이고, 국가안보실에서 인수인계 했겠지’라는 생각 대신 ‘내가 처음 보고한다’고 가정하고 보고서를 만들었다면 이번 사건이 일어났을까.

4월 26일 오전 경북 성주군 성주골프장으로 사드 관련 장비를 실은 트레일러가 들어가고 있다. 성주=연합뉴스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28일 오찬에서 사드 추가 배치를 문의하자 한민구 국방부 장관이 “그런 게 있었습니까”라고 반문했는데, 정 실장이 한 장관의 모호한 반문을 듣고 구체적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오찬 자리에서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도 논란거리다. 한 장관은 조만간 물러날 인물이고 정 실장은 새 정부의 외교안보정책을 이끌어갈 사람이다. 사드 관련 정보가 아쉬운 사람은 정 실장이다. 따라서 더 많은 질문을 퍼부어 한 장관을 몰아붙여 사드에 대한 정보를 얻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드러난 것은 딱 두 마디뿐이다. 1시간 동안 만나서 두 마디만 하고 밥을 먹었을까. 이것이 사실이라면 소개팅에서 처음 만난 남녀보다도 이야기를 안했다는 뜻이다. 새 정부가 강조하는 소통 대신 불통(不通)만 남은 오찬이었던 셈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17일 취임 이후 처음으로 국방부를 방문, 전군 지휘관이 모인 자리에서 발언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청와대와 군의 밀월은 깨졌다

사드 보고 누락에 대한 진상 조사가 미국의 예민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등 파장이 확산되자 청와대는 ‘국내적 조치’라며 진화에 나섰다. 진상 조사를 통해 미국, 일본과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사드 배치 절차를 동결시켰고 군에도 경고 메시지를 준 효과를 거뒀기 때문에 굳이 ‘확전’을 할 필요는 없다는 관측이 나온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청와대와 군 사이의 장벽을 더욱 높이는 위험을 초래했다. 국방부의 사드 보고 과정에서 발사대 추가 반입 사실이 누락됐다면 이에 대해 경고 메시지를 보내고 진상을 파악하는 것은 로키(Low Key)로 진행해야 했다. 부모가 자식을 혼내기 전 이웃들에게 “내 아들을 혼내겠다”고 알리는 경우는 없다. 한 장관을 청와대로 조용히 불러 따끔하게 경고해도 그 효과는 충분하다. 그런데 청와대는 생방송으로 진상조사 사실을 알려 상명하복이 생명인 군에 ‘항명’ 낙인을 찍었다. 북한 핵과 미사일 위협 대응으로 1년 내내 경계태세를 유지하느라 지쳐있는 군에 뒤통수를 친 셈이다.

많은 군인들은 자신들의 선배인 한 장관의 위상이 공개적으로 추락한 것에 속앓이를 하고 있다. 이는 청와대에 대한 심리적 반감과 불신으로 이어지면서 주요 사안에서 비밀주의를 키워 문민통제 확립을 더욱 어렵게 할 우려가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4년 노무현 정부 시절 발생한 작전계획 5029다. 1999년 북한 급변사태 대비를 위해 등장한 개념계획 5029를 작성 주체인 한미연합사는 작전계획 5029로 발전시키길 원했다. 연합사는 합참에 작계 5029 작성을 제안했고 합참은 이를 받아들여 2004년 말 초안이 만들어졌다. 이 과정에서 합참은 청와대에 보고를 하지 않았다. 뒤늦게 이를 안 청와대가 제동을 걸어 개념계획 5029를 발전시키는 수준에서 이 일을 마무리했다. 새 정부에서 이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을 방지하려면 국가안보실이 군을 압도하는 전문성을 확보해야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지난달 11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통화하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 청와대사진기자단
보고서에서 사드 발사대 4기의 추가반입을 적시하지 않은 것은 국방부의 잘못이다. 국방부는 사드 배치 과정에서 논란의 빌미를 여러 차례 제공했다. 국민 정서와 동떨어진 ‘갈라파고스’식 정책 서비스로 고립을 자초했다. 하지만 진실을 밝히겠다고 망신주기 식으로 군을 사정없이 몰아세우면 돌아오는 것은 정치적 갈등과 군의 사기 저하뿐이다. 새 정부 출범 직후 북한은 매주 미사일을 발사하며 기술적 능력을 과시하고 있다. 핵 기술도 미사일에 탑재할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관측이 계속 제기된다. 북한이 언제든 국지도발을 감행할 위험도 도사리고 있다. 대선 공약인 전시작전통제권 전환과 국방개혁 등을 추진하려면 군의 호응이 필요하다.

미운 행동을 해도 자식을 기꺼이 끌어안는 부모처럼 청와대는 이번 사건이 마무리되면 후임 장관을 조속히 임명하는 등 출구전략을 통해 군을 다독여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새 정부와 군의 관계는 5년 내내 삐걱거릴 것이다. 지금의 한반도 안보 상황은 갈등을 허용할 만큼 한가롭지 않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